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용은 우리 가슴 속에 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지난해 송년공연 관람작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연광철(베이스)과 정명훈(피아노)의 ‘겨울나그네’였다. 청춘기부터 30년 넘게 들어온 곡이다. 특히 첫 곡 ‘잘 자요(Gute Nacht)’는 독일어로 외워 직접 불러보고 싶어서 가사(빌헬름 뮐러의 시)까지 구해 놓았지만, 부끄럽게도 가사집은 몇 년째 가방 속에서 잠만 자고 있다. 지난 연말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1층 무대 앞 오른쪽 끝자리. 시종 고개를 외로 틀어야 했기에 목이 뻐근해질 정도였으나 가슴만은 청년 시절과 똑같이 벅차 올랐다. 중간 휴식도 없이 1시간20분 동안 공연한 연광철과 정명훈은 과연 최고의 파트너였다.

정작 본인은 이런 표현을 싫어한다지만, 베이스 연광철은 ‘개천에서 용이 난’ 경우다(물론 내가 말하는 ‘개천’은 지극히 세속적인 분류에 따른 것이다). 충주에서 공업고교를 졸업하고 치른 건축기능사 자격 시험에 떨어졌다. 음악교사로 방향을 틀어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입학해서야 성악가로서의 뜻을 굳힌 것은 음악계에선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 그가 독일 유학을 계기로 플라시도 도밍고·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거장들의 극찬을 받았고, 세계적인 성악가로 지구촌을 누비고 있다. 올해 3월부터는 서울대 음대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연광철과 1965년생 동갑내기인 화가 김동유도 마찬가지 케이스다. 고교 미술반 출신으로 미술계의 학벌과 별 인연이 없는 목원대 회화과를 나온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작가’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55위)되기도 했다. 어찌 음악이나 미술뿐일까.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개천’ 출신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사리 만나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그만큼 역동적인 나라다. 아직은 희망이 가득한 나라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연말 의미 있는 보고서 한 편을 내놓았다.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제목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에게 그대로 옮겨진다면 경제적 이동성(intergenerational economic mobility)이 낮은 것이다. 반대로 자녀의 경제적 지위가 부모의 경제력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결정된다면 경제적 이동성이 높은 사회, 즉 역동적인 사회가 된다. 보고서의 결론은 한국이 아직은 경제적 이동성이 상당히 높은 사회, 활력이 넘치는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역동성은 핀란드·스웨덴 같은 북유럽 수준으로, 영국·미국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라는 결론에 나는 적이 안도했다. 광복 이후 압축성장과 산업구조의 급변으로 많은 상위 직종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아도 교육을 통해 이런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고서의 분석에 나도 동의한다. 심지어 6·25전쟁조차도 그 자체는 엄청난 비극임엔 틀림없으나, 국민들의 계층·지역·부(富)의 이동을 활성화시켜 결과적으로 사회 역동성에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지 않은가. 다만 보고서도 지적한 대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 교육의 질(質)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어서 앞으로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 걱정이다. 정부 정책의 초점이 유아기 때부터 ‘교육기회 균등’에 맞춰져야 하는 이유다.

차제에 한 가지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덧붙이고 싶다. 사회가 아무리 역동적이고 정부가 아무리 교육비 지원을 강화해도, 결국 개천에서 솟아오르는 주체는 정부나 장학재단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라는 진리다. 용(龍)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다.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고(자존감), 자기 스스로를 믿고(자신감),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눈(긍정적 사고)을 갖춰야 가슴 속의 용이 고난을 이기고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 영화 ‘에어리언’에서처럼 흉포한 외계 괴물을 가슴에 심는다면 개천 아니라 드넓은 호수를 제공해도 결국 사회에 해만 끼친다. 특히 젊은이들이 ‘마음 속의 용’을 소중히 키우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