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통곡은 채찍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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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셨단 말입니까/정녕 가셨단 말입니까/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나는 그 비보를 믿고 싶지조차 않습니다… 리별이 너무도 길었습니다/분렬이 너무도 모질었습니다/무정했습니다." 북한의 계관시인 오영재씨가 자작시의 마지막 부분인 '무정했습니다' 를 읽고는 어머니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離散의 설움 정치인 탓

이산가족 누군들 시인이 아니랴. 바다 같은 먹물이 있어도 모자라고 하늘 같은 두루마리가 있다 해도 그 절절한 사연 적기에 부족할 것이다.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이처럼 대규모의 통한과 설움을 함께 안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 통한의 설움이 어디서 생긴 것인가. 나는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우리 정치가에 있다고 본다.

새로운 관점에서 로마 역사를 쓰는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를 지난해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째서 여성작가가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에만 그렇게 관심이 깊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얼마 전 로마에서 한 전시회가 열렸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외족이 쳐들어왔을 때 로마시민들이 무엇을 숨겼는가를 보여주는 특이한 전시회였다. 전시품은 보잘것없는 가재도구였다. 밥짓는 냄비와 그릇 등이 고작이었다.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죽고 손해보는 것은 서민인데 서민들은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망했을 때 많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금은 보화를 싸들고 동로마로 도망갔지만 어렵고 힘들게 살아간 것은 일반 서민들이었다. 정치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 정치란 이렇듯 우리의 삶과 직결된 것이다. 구한말이나 해방정국에서 보인 정치가들의 난맥.분열.무능이 망국과 분단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이산의 한을 맺게 한 무거운 책임도 정치인에게 있고 그 한을 지금 풀어주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 개막도 정치인의 공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남북관계를 맞으면서 우리 정치는 아직도 제대로 된 내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남북 정상간 공동선언과 부분적 실천에도 불구하고 야당 정치인들과 많은 지식인들이 회의와 우려의 눈짓을 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선 통일 개념에 대한 정치인들 스스로의 혼란 탓이라고 본다. 남북 하나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데 통일이 다가선 듯한 여당 주장에 야당 정치인들이 선뜻 합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반대한다면 반통일세력으로 몰린다는 불안이 있다.

이를 위해 나는 '통일' 보다 '통합' 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간 사회문화적 이질화를 막고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통합 노력이 우리가 주력해야 할 당면과제다. 이 통합노력을 거쳐 유럽 같은 경제통합기구로 발전한다면 그 다음이 정치적 통합으로 가는 길이다.

따라서 통합논의는 통일논의가 아닌 군사적 긴장관계를 완화하는 평화논의가 된다. 하나와 하나가 합쳐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둘이 되는 복수의 통합개념이라야 남북 정치인이나 남남 정치인, 그리고 국민이 경계하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통일개념이 된다.

***민족의 恨 씻는 정치를

또 정치인들은 여든 야든 아직도 정권 차원에서 남북협력을 계산하고 따지기 때문에 남북문제에 대한 합의 도출이 어렵다고 본다. 화해 협력시대의 개막이 여에 유리하고 야에 불리하다는, 남에 불리하고 북에 유리하다는 주판만 놓고 있기에 정부의 대북정책에 발목잡기나 하는 정치인들로 부각된다. 비판과 감시는 야당과 언론의 고유영역이다.

그러나 화해 협력의 총론에 합의했다면 초당적 남북협력기구를 국회 안에 설치하고 그 안에서 비판과 개선 또는 새로운 협력안을 내놓아야 한다. 야당 총재의 방북도 계산 아닌 화해의 큰 틀에서 결정해야 한다.

로마 번영의 열쇠는 화해와 관용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정치인들이 좀 더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적을 용서할 줄 모르는 그리스의 원론주의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관대함(클레멘티아)을 미덕으로 여기는 로마의 개방성이 제국의 길을 연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동과 서가 갈리고 보수와 혁신이 나눠져서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 우리 사회, 우리 정치로는 민족의 한을 풀 수가 없다. 민족의 통곡을 정치인에 대한 채찍으로 받아들이는 정치가가 있어야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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