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 대화록 해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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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언론사 사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체제유지를 위해 양측 정부가 통일문제를 이용해 왔다" 고 말하는 등 예의 현실감각을 보였다.

그는 또 일부 주목할 만한 구상과 결단을 밝히기도 했다.

유일(唯一)지도체제라는 북한 정치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그의 말이 지닌 정책 함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우선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첫째,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는 이번 8.15 행사에 그치지 않고 9, 10월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과 내년에 이산가족의 가정방문이 가능하도록 종합적으로 검토할 뜻을 밝혔다. 상봉 숫자가 적다는 서울의 여론을 의식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남북 교류 확대와 관련 군부의 반대가 있지만 직항로 개설 및 경의선 공사에 적극적인 의지를 천명했다. 특히 장관급회담에서 합의를 서둘러 경의선 공사 착공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휴전선에 배치된 2개사단 3만5천명을 투입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셋째, 당국간 회담의 정례화와 관련해 8월 29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2차 장관급회담까지는 '인사수준' 의 회담을 진행하겠지만 3차부터 본격 회담체제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넷째, "북한 언론도 한라산 해돋이를 봐야 한다" 는 말로 언론교류·협력에 적극적인 의사가 있음을 시사했다.

남북 언론인의 합의에 따라 주필·논설위원을 비롯, 언론인의 교류가 가능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 그는 한국 언론의 북한 관련 기사를 챙겨 보고 있다고 말해 우리 언론의 대북 보도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드러냈다.

다만 서울 답방은 '적절한 시기' 에 하겠다고 하면서도 시기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는 가을에 러시아 방문이 예정돼 있다고 언급, 가을 방문은 어렵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빚을 졌다' 는 표현을 굳이 사용함으로써 답방이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그밖에 개성공단.관광문제를 6.15 남북 공동선언의 선물로 표현하는 등 정상간 합의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교차관광 및 2005년 금강산과 설악산의 연계관광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 남북관계에 관한 金위원장의 언급은 관계개선의 전망을 밝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남북간의 교류협력을 보다 확대하겠다는 의사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金위원장은 노동당 규약 개정 구상을 재확인하는 등 북한 내정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을 하기도 했다. 7차 당대회를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남북관계가 화해국면으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다시 준비하고 있다고 시사한 대목이다.

또한 1940년대에 만든 당 강령도 과격하고 전투적인 표현이 많아 손질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다만 강령 수정에 따라 김일성(金日成)주석 시대에 일한 연로한 당 간부의 교체가 필요한데 자칫하면 이들에 대한 숙청으로 비춰질까봐 보류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흥미롭다.

그밖에 金위원장은 북한과 미국간의 수교문제에 대해서는 테러국가 문제가 해결되면 가능하다는 단순한 인식을 보였으나 미국의 새 정부가 어떤 대북 정책을 펼지가 궁금한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외교활동으로 관심을 불러 모았던 '북한의 조건부 로켓 개발 유보' 를 재확인하면서도 미국의 대가 지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달리 일본과의 수교는 과거사 청산문제가 걸려 있어 복잡하다는 인식을 보여줬다.

金위원장은 언론사 사장단과의 대화에서 지난 6월 정상회담 기간 못지 않은 많은 정책표현들을 쏟아냈다.

또한 개인취향도 밝히면서 정치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영화일에 종사했을 것이라는 신상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재치와 유머로 좌중을 사로잡는 그의 접견 방식이 정상회담에 이어 유감없이 드러난 셈이다.

그는 또 남북한의 언론을 비교하며 남측이 신속성에선 앞서지만 정확성은 북측만 못하다거나, 방문단이 서울로 돌아가 천편일률에서 벗어나 각사가 개성을 살려 보도할 것을 주문하는 등의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金위원장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6.25와 관련, '열강이 우리를 부추겨 우리 민족은 희생한 것' 이라며 '덮어놓을 것은 덮어놓자' 고 말해 사과를 비켜간 대목에 공감치 못할 우리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金위원장은 또 '내가 무엇 때문에 큰 나라들을 찾아다니나' '평양에 앉아 있어도 여러 열강에서 찾아온다' 고 언급하는 등 그 자신이 국제사회에 적극 진출할 의사는 없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국제사회의 활발한 정상외교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권력 원천으로 군력(軍力)을 꼽은 대목도 21세기에 걸맞은 개방형 지도자라고 하기에는 곤란할 듯하다.

우리 국민은 金위원장이 국제사회 진출에 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갖기를 기대하고 있다.

유영구 북한문제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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