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반대 있지만 … " 교류에 강한 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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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한국 언론사 사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체제유지를 위해 양측 정부가 통일문제를 이용해왔다' 고 말하는 등 예의 현실감각을 보이며 일부 주목할만한 구상과 결단을 밝혔다.

유일(唯一)지도체제라는 북한 정치의 특성을 감안하며 그의 말이 갖고 있는 정책 함의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선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첫째,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는 이번 8.15행사에 그치지 않고 9월과 10월에 한차례씩 상봉이 이뤄질 것이라는 점과 내년에 이산가족의 가정방문도 허용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검토할 뜻을 밝혔다. 이산가족 상봉의 숫자가 적다는 한국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남북 교류확대와 관련, 군부의 반대가 있지만 직항로 및 경의선 공사에 적극적인 의지를 천명했다. 특히 장관급 회담에서 빨리 합의해 경의선 공사에 착공하게 되면 분계선에 배치된 2개 사단 3만5천명을 투입하겠다는 설명이었다.

셋째, 당국간 회담의 정례화와 관련해8월 29일의 2차 장관급 회담까지는 '인사수준' 으로 회담을 진행하고 3차부터 본격적으로 가속하겠다는 것을 확인했다.

넷째, '북한 언론도 한라산 해돋이를 봐야 한다' 는 말로 남북 언론교류.협력에 적극적인 의사가 있음을 재확인했다.

언론사 주필과 논설위원 등의 방북에 대해 남북 언론인의 합의에 따라 시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판문점 연락사무소를 통해 남측 신문을 보내주면 읽겠다는 의사표현도 있었다. 한국언론의 북한 관련 기사는 다 읽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해 우리 언론의 대북보도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음을 시사했다.

다만 金위원장은 서울 답방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기' 에 하겠다고 하면서도 시기를 밝히지는 않았다. 시기와 관련,가을에 러시아 방문이 예정돼 있다고 언급,가을 방문은 어렵다는 뉘앙스를 보였다.

그러나 굳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빚을 졌다' 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답방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는 그밖에 개성공단과 관광문제를 6.15 남북공동선언의 선물로 표현하는 등 남북 정상간의 합의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도 보여주었다.

금강산과 설악산의 연계관광은 2005년의 과제로 언급하고 백두산과 한라산의 교차관광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

이러한 남북관계에 관한 金위원장의 언급은 관계개선의 전망을 비교적 밝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개방의 문을 좀더 열겠다는 의사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金위원장은 노동당 규약이 고정불변이 아니고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언급해 당규약 개정 구상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와 관련, 북한 내정에 대한 흥미로운 지적도 있었다.

7차 당대회를 이미 준비했는데 남북관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이미 걸맞게 다시 준비하고 있다고 한 대목이다.

또한 1940년대에 만든 노동당 강령도 현실에 맞게 손질해야 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인식을 보였다.

당강령의 수정은 자칫 김일성(金日成)주석 시대의 지도자들에 대해 숙청으로 비춰질까봐 보류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있었다. 북한 역시 구시대 정치를 청산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나 빨치산 원로들을 비롯한 金주석 시대의 지도층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을 보여줬던 것이다.

그밖에 金위원장은 북한과 미국간의 수교문제에 대해서는 테러국가 문제가 해결되면 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였으나 미국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외교활동으로 관심을 불러모았던, 다른 나라가 위성을 대신 발사해주면 로켓 개발을 안하겠다는 북한의 정책변화에 대해서는 사실로 확인됐다. 다만 미국정부가 이 문제를 다루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金위원장은 이 문제와 관련, 푸틴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워싱턴 포스트 8월 3일자 보도는 왜곡이라며 부인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과는 달리 일본과의 수교문제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 북잡하다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金위원장은 이번 언론사 사장단과의 대화에서 개인취향도 밝히면서 정치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영화일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소탈하게 자신의 신상에 관한 언급도 했다. 재치와 유머로 좌중을 사로잡는 그의 접견방식이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이번에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또한 남북한의 언론을 비교하면서 남측은 신속성에서 앞서지만 정확성은 북측만 못하다고 언급하며 방문단이 서울로 돌아가 각사가 천편일률에서 벗어나 개성을 살려 보도할 것을 주문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金위원장은 '내가 무엇 때문에 큰 나라들을 찾아다니나' '평양에 앉아 있어도 여러 열강에서 찾아온다' 고 언급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나올 뜻이 별반 없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국제사회의 활발한 정상외교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자신이 권력의 원천으로 군력(軍力)을 꼽은 데서 알 수 있듯이 21세기에 걸맞은 개방형 지도자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 국민은 金위원장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국제사회 진출에 보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갖기를 기대하고 있다.

유영구 북한문제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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