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올리비에 드 베랑제 주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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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은 진정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며 반세기에 걸친 냉전의 상처를 보듬는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나는 17년간 한국에 살면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헤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혈육을 그리워하면서 남북을 두동강 낸 휴전선이 인위적인 장막일 뿐 남북한은 한나라 한민족이라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생이별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희망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물꼬를 트는 작업이기에 이번에 제외된 많은 사람들도 함께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만남이 그들의 가슴 깊숙이 새겨진 상처와 고통을 완전히 치유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헤어질 때 코흘리개 어린아이였던 이가 중년의 가장이 됐고 사춘기 청소년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굽었습니다.

그 5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만남은 남한의 가족이나 북한의 친지들 모두에게 힘든 일입니다.

10여년 전 분단 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처음 실현됐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지학순(池學淳)주교님과 북한의 누이가 상봉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들의 상봉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했습니다.

서로 잘 지내고 있다는 형식적인 말들 뒤에는 그들의 아픔을 웅변하는 안타까운 눈과 눈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반세기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온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혈육조차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언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남한의 경우 좋든 나쁘든 오랫동안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50년 전 국가의 모습을 마치 냉동실 속의 쇠고기처럼 그대로 보존해왔습니다.

이제 화해와 교류의 계단을 밟아올라가면서 정치.경제적으로 보다 성숙한 남한이 이처럼 냉동상태의 북한을 어떻게 잘 포용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안기 위해 끝없는 인내와 민족애, 그리고 지혜가 필요합니다.

뒤떨어진 북쪽 사람들을 위해 왜 자신들이 희생해야 하느냐고 반발하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도 이해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반세기에 걸친 분단의 후유증은 남과 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냉전의 희생자로서 과거 독재정권들에 의해 수십년간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으로 고국을 떠나 있어야 했던 사람들이 아직 지구촌 곳곳을 떠돌고 있습니다.

남북 화해와 함께 이제는 이런 소외자들을 둘러볼 때입니다. 이는 한국의 정계.학계.경제계.종교계, 그리고 사회단체 등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들입니다.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믿습니다.

올리비에 드 베랑제 <프랑스 카톨릭 생드니 교구 주교>

<올리비에 드 베랑제는…>

◇ 약력▶1938년 프랑스 쿠르부아 출생▶70년 영국 버밍엄대 신학박사▶76~93년 한국에서 노동사목으로 활동(한국명 오영진)▶94년 로마 교황청 전교회 프랑스 지부장▶96년 생드니 교구 주교 서품▶99년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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