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아픈 것도 서러운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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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가을철 각급 학교 운동회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게임 중에 2인3각 달리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다리 하나씩을 묶은 채 세 다리로 달리는 경기다.

이 게임은 두 사람이 호흡을 잘 맞춰 욕심을 버리고 조화를 이뤄야만 넘어지지 않고 좋은 결과도 나오게 마련이다.

두 다리나 네 다리 달린 동물은 많지만 세 다리 동물이 지구상에 없는 것은 3개의 축이 박자와 리듬을 맞춰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 제자리 못찾는 의약분업

요즘 우리사회의 의약분업 진흙탕 싸움은 마치 세 다리 동물이 뒤뚱거리며 허우적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정부와 의.약계 누구 하나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서로 먼저 고지를 점령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점점 수렁에 빠지고 상처만 커지는 형국이다.

이 바람에 '약품 오.남용으로부터 국민 건강을 지키자' 는 더없이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의약분업이 의사는 의사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불평 불만만 쌓이면서 오히려 환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있다.

의사들은 현 의약분업 체계로는 생계유지가 안돼 진정한 의사는 모두 죽게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가운을 벗어버렸다.

또 의약분업의 뼈대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약의 오남용을 막기 힘들다는 주장도 한다. 약사들은 거액을 들여 의약품을 구비했는 데도 처방전대로 약을 지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소규모 동네 약국은 문을 닫게 된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환자들이다. 몸 아픈 것만 해도 서러운데 병원의 진료 외면에다 약국까지 찾아헤매야 하니 분통이 터지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다 의사와 약사간의 불화에 따른 시비와 사고까지 잇따르고 있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사실 의약분업 제도를 자세히 보면 의사나 약사보다 국민들이 먼저 분노하고 거부해야 할 판이다. 당장 의료비 부담은 늘고 의약품 서비스 등은 훨씬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과연 왜, 무엇을 위해 이처럼 고통을 견뎌가며 의약분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약품 오.남용 방지가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이긴 하지만 그 필요성을 제대로 이해.설득시키지 못한 까닭에 다수가 의약분업을 먼 나라의 이상쯤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진작 국민들에게 그 필요성을 납득시켰다면 의약분업 제도의 도입은 훨씬 쉽게 이뤄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것은 전적으로 정부 잘못이다. 의약분업이 시행되면 의.약계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은 18년 전 목포지역 시범실시 때 충분히 입증됐었다.

총칼을 쥔 군사 독재권력도 뜻을 이루지 못한 어려운 문제였는데 지금 정부가 묘수도 없으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판단 잘못이나 무모함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국민들이 달가워하지 않고 이해 당사자인 의사.약사들이 대립하는 마당에 능력없는 정부가 명분만 믿고 욕심을 내 덤빈 꼴이니 잘 될 리가 있겠는가.

국민을 위한 좋은 제도지만 절차를 소홀히 하고 성취욕만 앞세운 잘못된 행정으로 망친 꼴이 됐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 투쟁 접고 대화로 해결을

그러나 의사도 약사도 이제 더이상 환자를 골탕먹이는 일은 끝내야 한다. 아무리 명분있는 투쟁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무작정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고 피해를 줄이는 것도 용기요, 지혜다.

의약분업 자체를 없던 일로 되돌리기엔 그동안의 희생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대화로 해결하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마침 주무 장관이 바뀐 데다 대통령도 적극 독려하는 등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강경 일변도였던 의사단체도 대화의 뜻을 보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무엇보다 정부는 불리하면 감추고 유리하면 과대포장하는 식의 신의없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국민적 신뢰를 받는 투명 행정이라면 해결 못할 일이 없다. 또 정치권 논리에 좌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몇번씩 시행을 연기했던 것도 사태악화의 한 요인이 아닌가. 제발 쇠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 정부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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