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여름 구름처럼 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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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덥다. 올해는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성급한 더위가 찾아와 사람들을 녹초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더위는 지금부터다.

신문.방송도 연일 더위 보도에 열이 올랐다. 찜통이니, 살인더위니 하고들 얼마나 더운지 경쟁이나 하듯 야단이다. 거기다 불쾌지수까지 친절하게 보도하니, 그럭저럭 지내던 사람까지 순간 더위를 느끼게 한다. 여름이라 보도할 게 별로 없는 건지, 괜히 짜증을 부추긴다.

더우면 대뇌의 공격중추가 자극돼 쉽게 짜증이 나고 흥분해 자제를 잃기 쉬워진다. 최근 대형 노사분규 현장이 과격화하고 폭력화하는 것도 더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밤이면 오토바이 폭주족도 기승이다. 그러하지 않아도 부실한 여름잠을 싹 앗아가 버린다. 폭력.교통사고도 더위와 함께 증가한다는 게 경찰의 걱정이다. 하한기라 장사도 안되는데 모든 게 짜증이다. 속이 부글거린다.

그러니 죽어나는 게 에어컨이다. 연일 전력소비가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하루를 꼬박 틀고 있으니 여름 감기도 극성이다. 나른하고 팔다리가 저리고 가벼운 현기증.오심.구토까지 벌써 냉방병이 등장했다.

잠깐을 못참아 환기도 하지 않으니 실내 공기가 어떠하리란 건 불문가지다. 잠시도 밖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한 블록도 걷지 않으니 차량의 배기가스도 여름이 최악이다.

도심의 온도는 해마다 올라가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도 가속화하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다. 이상기후가 세계 곳곳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공존해 오던 지구가 드디어 인류의 오만에 대해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지않아 다가올 대재앙을 경고하고 있지만 인류는 아직도 오만불손하다. 이미 그런 징조는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구는 생명체다. 더 이상의 상처를 내면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중환자가 된다. 이미 고열이 나고 있다.

우린 지금 24시간 인공환경 속에 살고 있다. 너무 편하게만 지내다 보니 자연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진다. 면역체계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약해졌다. 부신피질의 방위호르몬도 떨어져 작은 스트레스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정도 더위도 못 견뎌 그렇게 헉헉대다니, 수만년을 이땅에 살아온 조상이 웃는다. 잔꾀 부릴 생각 말자. 여름은 여름스럽게 나야 한다. 여름은 덥다.

우선 이 엄연한 사실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인간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대자연의 순환법칙이다.

우리 선조들은 수만년을 여기에 순응하며 적응해 살아왔다. 여름은 덥다. 그래서 여름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하는 데서 현대인의 비극이 시작된다. 왜 이리 덥지? 그럴수록 더 덥고 짜증만 난다.

설마하니 여름이 시원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여름은 시원할 수도 없고, 또 시원해서도 안된다.

여름용품이 팔리지 않으면 당장 시중 경기가 돌아가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여름이 시원하면 냉해병으로 식물이 성장을 중지하고 우린 풍성한 추수를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시원한 여름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모처럼의 해수욕, 물이 차가워 바다에 못 들어간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그 아쉬움을 알리라. 시원한 맥주 맛을 즐기려면 냉방이 잘된 방에선 안된다. 삼복더위에 논을 매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안해본 것만으로도 행운이요 축복이다.

그러나 논을 매본 사람에겐 또 다른 축복이 있다. 엎드려 매다가 한 고랑이 끝난 후 고개를 드는 순간의 그 '시원함' 이라니! 작열하는 태양, 그늘 하나 없는 들판에서 시원하다니□ 이해가 안될 것이다.

그건 해본 사람만이 아는, 차원이 다른 축복이다. 한 여름 뜨거운 국을 먹으면서 땀범벅이 된 채 "어, 시원하다" 하는 사람이면, 논두렁에 잠시 앉아 '시원한 맛' 을 즐기는 농부의 경지가 이해될는지 모르겠다.

편한 데에만 길들여진 현대 도시인에게 이열치열의 경지를 설득하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될 수만 있다면 여름은 시원하게 나는 게 좋다. 다만 지나친 인공환경에의 노출은 삼가자는 뜻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편안한 마음자세로 여름을 나자는 것이다. 나무 그늘도 찾고 시원한 물에 목욕도 하고 부채질도 하면서 여름 구름처럼 좀 여유롭게 나자. 개인의 건강, 사회적 부담, 지구의 환경을 생각하는 건전한 여름이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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