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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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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범띠해가 되면 떠오르는 전통 문화 유산 가운데 사인검(四寅劍)이 있다. 칼 이름이 사인검인 것은 범띠해(寅年) 음력 정월(寅月)의 첫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들어지는 검이기 때문이다. 백수의 왕인 범의 기운이 네 번이나 겹치기 때문에 양기가 극에 달해 있어 온갖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전해진다. 같은 원리로 용의 기운을 담은 사진검(四辰劍)이라는 칼도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는다.

12년에 한 번씩, 그것도 정해진 날의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에만 만들 수 있다는 데서 일단 희소성이 보장된다. 이 때문에 왕실·종친이나 소장할 수 있던 귀한 칼이지만 사람을 베는 검은 아니다. 악신이나 도깨비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제례용 참사검(斬邪劍)의 한 종류였으므로 아예 날을 세우지 않았다.

참사검이란 본래 중국 후한시대 오두미도를 창시한 도교의 지도자 장릉이 옥황상제로부터 선물받았다는 칼이다. 사인검의 검신에도 북두칠성과 이십팔수(二十八宿) 등 별자리, 부적과 진언이 새겨져 있어 도교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당연히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 출신의 조정 대신들은 이 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왕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1506년 사인검을 무려 200자루나 만들게 할 정도로 이 칼의 애호가였지만 바로 뒤를 이은 중종은 1529년 대신들의 반발로 제조를 취소한 적이 있다.

최근 들어 몇몇 사람이 전통 양식대로 사인검을 복원하곤 했지만, 현대의 장인들에겐 유력 상품인 사인검을 종전 그대로 12년에 한 번씩만 만들어 내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더구나 준비기간만 3개월이 걸린다는 조선시대의 사인검 제조법은 어찌나 엄격한지 이를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180년이 넘은 철을 재료로 쓰고, 경신 또는 신유년에 태어난 장인을 찾아 태을(太乙) 방향에 화로를 설치하고 쇠를 녹이며… 검을 만든 뒤엔 반드시 흰 닭으로 제사를 치른다’는 등 갖춰야 할 조건이 한둘이 아니다.

사인검으로 물리칠 요괴와 잡신들은 산업사회와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사인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 장인들의 공덕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인년 정월, 새해를 설계하는 마음의 자세로는 훌륭한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송원섭 JES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