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라이프] '한옥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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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 좋은 길을 망쳐놓는지"

이즈미 지하루(泉千春.39.여.서경대 일어학과 교수)씨는 눈꼬리가 내려가 선하게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가 말하는 '그 좋은 길' 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가회동, 팔판동 일대 한옥촌이 만들어 냈던 올망졸망.꼬불꼬불한 돌담길이다.

1992년 가장 한국적인 마을을 찾아 팔판동으로 이사왔을때만 해도 그는 이 길을 걷는 재미를 만끽했다. 몇번을 별러서 토기라도 사들고 들어오는 날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현대식 건물들이 야금야금 한옥촌을 갉아먹으면서 그런 정취가 사라졌다. 감사원 앞으로는 널찍한 찻길이 났고 덕성여중고 주변에서도 사람냄새가 사라졌다.

일본 전통문화를 전공하다 85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와 15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그는 "한옥에서 사는게 꿈" 인 일본인이다.

게릴라식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22일 가회동의 한 한옥에 모여앉아 이즈미 교수의 말을 듣던 10여명의 '한옥을 좋아하는 사람들' 회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회동 일대 '북촌(北村)마을' 주민들이 주축이 된 이 모임은 회원이 20명에 불과하고 회칙도 없는 모임이지만 한옥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한결같다.

모임을 주도하는 박인숙(朴仁淑.40.여)씨는 지금 살고 있는 한옥이 전세집이다. 자기집은 아니지만 한옥에 대한 열정만은 남다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땅을 밟을 수 있는게 좋아요. "

이날 모임이 열렸던 집 주인인 김연숙(金蓮淑.44.여)씨는 5년전 이사왔다. 그전엔 전국에서 제일 살기좋은 도시라는 경기도 과천에 살았다.

삐꺽거리는 고가구(古家具), 뭉툭한 토기에 빠져있던 金씨에게 이사는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남편이 "한옥, 한옥 하지만 불편해서 못살거야" 라며 반대했기 때문.

남편 몰래 이곳저곳을 뒤져 이 곳을 찾아내곤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는 등 내부 수리까지 했다. 혹시나 했던 아이들도 잘 적응했다.

그러나 한가지 불편한 점은 아파트보다 춥다는 것. "첫해 겨울에 애들 손이 텄어요. " 金씨의 말을 30년간 이 곳을 지켜온 조일순(趙一順.65.여)씨가 가로막고 나선다.

"그게 좋은거야. 아파트에선 겨울에도 반팔 입고 살지만 여기선 계절에 맞을 정도로만 춥고 덥단 말이지. " 趙씨는 매듭 공예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20~30년씩 살아온 이들은 대부분 전통공예를 하는 장인들이다. 이들은 북촌마을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보존되길 바란다.

정부가 조금만 지원을 해주면 외국인들의 민박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공예를 가르칠 공방을 마련하고 규모가 큰 한옥은 '전통 여관' 으로 개발할 생각이다.

하루빨리 '전통건축물 보존지구' 로 지정받는 것은 이 모임의 가장 큰 소망이다. 지난달엔 서울시장과 만나 이런 뜻을 전달했다. 회원이 늘어나면 더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담근 식혜를 먹으며 2시간가까이 한옥보존을 논의하던 이들이 대화를 마칠즈음 때마침 비가 그쳤다.

金씨네 장독대위에 올라 그림같이 펼쳐진 한옥 지붕들을 바라봤다. 잠깐의 침묵끝에 누군가 꺼낸 한마디. "참 좋죠-. "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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