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라이프] 고려흑자 맥 잇는 김시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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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명지산 끝자락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가평요(加平窯). 서울생활을 훌훌 털고 낙향한 김시영(金時泳.42)씨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명성에 가려 명맥이 끊긴 고려흑자(黑磁)를 재현하는데 10년째 혼을 불어 넣고 있는 곳이다.

金씨가 도예가로 변신한 것은 1990년. 86년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다 신촌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부인 홍옥주(洪玉朱.41)씨.두 딸(11.15)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직장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 하고싶은 일을 영원히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도자기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고려흑자의 독보적 존재로 우뚝 선데는 대학시절의 엉뚱한 경험이 계기가 됐다.

대학 산악부 회원이었던 金씨는 동료 회원들과 태백산을 종주하던 중 우연히 검은색 바탕에 오색영롱한 빛을 내는 파편 한개를 발견했다.

이후 책자 등을 통해 그 파편이 고려흑자 조각이며 지금은 맥이 끊긴 사실을 알아냈다. 이 때부터 '고려흑자를 되살릴 수 없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게됐다. 대학졸업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으나 곧 사표를 내고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시험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89년 일본여행중 들른 박물관에 전시된 흑자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고려 흑자가 일본에서는 천목(天目)이란 이름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묘한 오기가 솟았다. '우리 것인데 일본에만 있다니…. 내가 고려흑자의 맥을 잇겠다' 고 다짐했다.

金씨는 귀국하자마자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부인 姜씨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아이들의 교육은 둘째치고라도 당장 생계도 어려운데 어떻게 시골로 내려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씨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金씨 가족들을 가평으로 내려와 장인이 빌려준 7백여평의 땅에 가건물 집과 작업실, 가마(길이 15m.너비 4m)를 지었다.

그리고는 불가마옆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도자기를 구워냈다. 처음에는 마음에 드는 작품이 10%도 안됐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도 들었다.

7년간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그는 97년 우연히 근처 운악산에서 그토록 바라던 흙을 발견하면서 흑자를 완성할 수 있었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의 심정이 그랬을 겁니다. "

그 흙으로 구워내는 순간 신비스런 색채를 띈 고려흑자가 눈앞에 태어났다. 흑자는 97년 일본과 국내에서 가진 전시회에서 전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가평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다.

아직은 작품 생산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한달에 1백여점 정도의 생활자기도 만들어 일본 등에 팔고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행복합니다. 고려흑자가 널리 알려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난해 한분야의 대가에게 주어지는 '경기 으뜸이 상' 을 받은 金씨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걷어내며 물레를 힘차게 돌렸다.

정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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