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탐구생활]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배우들이 연기도 잘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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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라이프스타일을 잘 아는 배우가 연기도 잘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이프스타일’이란 단어가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많이 사 보고 여기저기 다녀본 배우가 연기도 잘한다’는 주장이라고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결정적으로 힘을 얻은 건 드라마 ‘스타일’ 덕분이었습니다. 사실 김혜수가 연기를 잘한다고 느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타짜’ 같은 영화에서는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 사이에서 그녀만 동떨어져 연기하고 있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스타일’에서 김혜수는 패션 잡지 편집장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했습니다. 실제 패션 잡지 편집장이 아닌 ‘드라마에서 그렇게 그려질 수밖에 없는 패션 잡지 편집장’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는 말입니다. 패셔니스타로 오래 살아왔고, 패션 잡지 화보에도 꾸준히 등장해온 그녀이기 때문에 그런 역할도 자연스럽게 소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입는 배우가 입는 연기도 잘하는 것이죠.

반면 그녀의 상대역 남자 배우는 ‘마크로비오틱 셰프’라는 ‘첨단 라이프스타일 직업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의상이나 머리 모양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그 배우의 라이프스타일이 90년대적이라 2009년의 라이프스타일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 게 아닐까’하고 추측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미안합니다.

‘라이프스타일 연기론’을 주창하는 제가 가장 기대하는 배우는 배용준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고시레’라는 전통 한식 레스토랑을 운영합니다. 레스토랑을 직접 ‘프로듀스했다’라고도 보도되더군요. 저는 그 표현의 정확성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모던 한식당 ‘품서울’을 방문해 메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현직 소믈리에를 고용해 ‘와인 과외’를 받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배용준이 쓴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의 진정성도 믿습니다. ‘한국의 아름다움’이란 한류 스타 배용준의 이름을 아시아에서 책장사 하기에 딱 좋은 책 주제이기도 하지만 라이프스타일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가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직업란에 ‘농부’를 추가하고 싶다’고 말했다지요? 저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의 깊이를 짐작했습니다. 한 10년 안으로 ‘농사’ 혹은 ‘원예’가 한국 부자들의 취미로 떠오를 것이라는 게 라이프스타일 전문가들의 관측이거든요. 만약 『신의 물방울』이 드라마로 옮겨지고 배용준이 ‘토미네 잇세’ 역을 맡는다면 그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겁니다.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으로 치면 이정재도 배용준 못지않습니다. 그는 음식, 인테리어, 건축, 미술 등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예전에 청담동 서미 앤 투스 갤러리 앞에 서 있는 그를 보며 ‘전시를 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나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 갤러리를 자주 찾는다는군요. 유난히 자신에게 어울리는 배역을 만나지 못하는 그지만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을 맡으면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겁니다. 건축가 역할이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레스토랑 컨설턴트 노희영 이사가 런던에서 어느 남자배우에게 날린 코멘트를 인용합니다. 해롯 백화점으로 쇼핑 가자는 일행의 제의에 피곤하니 호텔방에서 쉬겠다는 그 남자 배우한테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연기든 뭐든 하루아침에 되는 게 없잖니. 뭐든 쌓여야 되는 거다.”

멋진 남자 역시, 갑자기 될 순 없겠죠. 라이프스타일은 무엇보다 경험이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멋’이니까요.

송원석 루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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