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민주화 보상과 속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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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자유민주주의를 '역사의 마지막 정거장' 이라고 과감히 설파한 학자가 있어 한 때 인구에 널리 회자된 적이 있다.

마르크스는 그 긴 역사의 마지막 파란불은 공산주의라고 했다. 소련이 무너지고 동구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이제 그 자리에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섰다.

이로 보면 민주주의는 대장정(大長征)이다. 길고 긴 험로, 무수한 희생과 질곡(桎梏), 허다한 도로(徒勞)와 투쟁을 거쳐 마지막 정거장에 가서야 마침내 밝게 켜지는 파란불이다.

그러나 이 파란불은 현실적으론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고 그 대표에 의해 정부를 구성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혹은 '절차적 민주주의' 만 되면 켜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거기서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정권 교체까지 했으니 파란불은 잘 켜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겐 그런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실제적 민주주의다.

'형식' 은 그런 대로 성공했지만 '실제' 가 되고 있느냐다. 이 실제의 실제적 민주주의는 어느 사회 없이 '개인 해방' 과 '인권' 과 '법치' 로 이뤄진다.

이 실제적 민주주의는 어느 사회 없이 또 '산업화' 와 병행해 이뤄진다. 문제는 초기과정에서 보여지는 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모순이다.

산업화가 최저수준인 후발개도국들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어김없이 격돌하고, 그리하여 민주화 과정이 예외없이 소용돌이친다.

이유는 이들 나라의 초기 산업화 과정이 모두 집단주의적이고 강압주의적인데 반해 민주화 과정은 항시 개인주의적이고 탈권력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데 있다.

개인주의적이지 않은 개인해방이 없고,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에 초점하지 않는 인권이 있을 수 없다면, 국가권력에 의해 정반대로 지향되는 산업화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특히 우리처럼 불균형 성장정책에 의한 초스피드의 산업화 과정을 겪은 나라들에선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우리에 앞서 독일.일본이 그러했고, 우리와 동시대인 대만.싱가포르가 그러하다.

어쨌든 그러한 난관과 곡절을 겪어 우리도 개인해방에선 상당 수준에 이르렀고, 인권도 그런 대로 수준에 올라 있다.

이는 이미 지난 세기의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뤄져 있었던 것이고, 특별히 현 정부에 와서 달성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정도 성과의 연원은 따져 올라가면 산업화 성공이고 민주화투쟁이다.

민주화투쟁을 우리처럼 그렇게 격렬히 하지 않고도 민주화한 일본이나 대만.싱가포르의 예에서 보면 개인해방과 인권의 성취는 무엇보다 산업화에 그 일차적 공이 있다.

그럼에도 민주화투쟁을 하다 희생당한 사람에게만 보상을 주겠다고 지난 4일 우리 각의(閣議)가 결정했다면, 산업화 과정에 희생당한 그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 것인가.

더구나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 성공도 많은 서양학자들이 말하듯 '박정희 산업화전략' 의 성공에 의한 남쪽의 경제력에 바탕한 것이라면 더더욱 산업화 과정의 희생자들을 어떻게 보상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민주화 투쟁을 한 사람들 만큼 민주주의 실현에 공이 없는가.

민주주의 실현의 가장 중요한 단계는 법치다. 법치의 실현 없이 성공하는 민주주의는 없다. 법치의 면에서 현 정부는 이전의 어느 정부보다 그 실현의 정도가 낮다.

법치가 아니라 '인치(人治)' 가 되고 있다는 것은 최근 많은 파동에서 정부의 신뢰가 너무 떨어져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 있고, 심지어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약속하라' 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더구나 편중인사와 낙하산 인사에서 더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민주주의와 독재주의 차이 또한 이 법치냐, 인치냐의 차이다.

이 법치의 면에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성공적이지 못한 현 정부가 가장 격렬히 민주화투쟁을 한 사람들을 보상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역사의 또 어떤 아이러니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인도적인 것인가, 정치적인 것인가. 산업화투쟁.민주화투쟁은 고귀한 투쟁이다. 고귀한 투쟁일수록 물질적으로 보상하면 빨리 속물화(俗物化)한다. 속물화할수록 고귀한 투쟁은 사람들 뇌리에서 급속히 사라진다.

송복 <연세대 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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