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극적대타협] '시장의 힘' 금융파업 끝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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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노조원들의 파업이 시작된 11일 노·정(勞·政)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원동력은 바로 시장의 힘이었다.

노조는 파업이 계속될 경우 파업 불참은행으로 돈이 빠져나가면서 파업은행의 구조조정을 재촉할 수 있다는 부담에 쫓겼다.

11일 파업 돌입 후 외환·기업은행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업무복귀 명령을 내린 것도 따지고 보면 시장의 압력에 밀린 것이었다.

파업에서 이탈한 은행의 노조 관계자는 "우리가 파업을 통해 지키려던 터전이 파업으로 더 빨리 망가지게 둘 수는 없었다" 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나 노조의 이번 파업은 정부를 협상테이블로 불러내고 쟁의 대상이 아닌 정부정책을 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산별노조를 통한 노동운동의 또다른 가능성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파업에 불참한 한 우량은행 직원은 "은행원의 고민과 금융정책의 현주소를 알린 게 이번 파업의 의미" 라고 말했다.

◇ 정부도 시장이 겁났다〓 '엄정대처' 와 '경찰력 즉시 투입, 주동자 소환' 등 강경대응 방침을 거듭 밝혔지만 정부도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장의 힘이 움직여 파업은행의 자금이탈이 가속화할 경우 자칫 금융혼란이란 대가를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위원회 고위관계자는 "한빛·조흥·외환은행 등 공적자금을 집어넣은 거대은행 중 한 곳만 유동성 위기에 몰려도 공적자금이 바닥난 정부로선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 이라며 "자칫 시장의 힘에 속도가 붙을 경우 최근 자금난과 맞물려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큰 혼란을 부를 것이라고 판단했다" 고 털어놨다.

정부가 "국민의 정부엔 관치금융이 없다" 란 종전의 입장에서 물러나 '관치금융 근절 선언' 으로 한발 후퇴한 것도 노조 파업의 충격보다는, 가늠할 수 없는 시장의 힘을 염려한 때문이다.

◇ 시장은 파업철회 먼저 알았다〓시장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주 후반부터. 파업은행에 고객문의가 빗발쳤고 주가도 파업 참여.불참 은행간 차별화가 시작됐다.

한빛은행의 경우 지난 4일 주가가 6월말에 비해 20% 하락했고 조흥.외환은행도 각각 9%와 13% 떨어졌다. 반면 하나은행은 3.5%, 신한은행은 0.9% 하락하는 데 그쳤다.

시장이 파업은행에 보낸 첫 신호였다. 파업 전야인 10일 시장은 이미 '파업을 해도 파괴력은 별로일 것' 이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날 모든 은행의 주가가 오름세로 돌아섰고, 특히 한빛.국민 등 파업참여 은행들의 주가는 평균치(2.5%)를 넘어 3% 이상 올랐다.

증시 관계자들은 "은행 구조조정이 빨라져 시장의 불확실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시장이 파업을 호재로 판단한 때문" 이라고 입을 모았다. 총파업일인 11일이 다가오면서 자금이탈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6일 조흥·한빛·제일·서울·외환·국민·주택은행의 저축성 예금이 일제히 줄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7월들어 지난 8일까지 조흥은행 4천9백66억원▶한빛 2천1백47억원▶서울 1천3백76억원▶외환 2천6백5억원▶국민 3천6백67억원이 빠져나간 것으로 집계됐다.

돈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파업대열에서 이탈하는 은행이 늘었고 11일 파업돌입 때는 일부 불편은 있었지만 모든 은행이 차질없이 정상영업을 계속했다.

◇ 구조조정 빨라질듯〓시장의 힘은 파업을 막는데 그치지 않고 은행의 구조조정을 계속 재촉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파업을 통해 일단 '파업 불참은행〓우량은행' 이란 등식이 시장에서 설득력을 갖게 된 만큼 우량.비우량 은행간 차별화에 속도가 붙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우선 파업을 주도했던 공적자금 투입은행의 부실 청소를 서두를 예정이다.

금감위 관계자는 "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의 부실을 빨리 청소하지 않으면 시장의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 며 "늦어도 내년 예금부분보장제 실시전까지는 지주회사로 묶어 깨끗한 은행으로 만든다는 게 정부 방침" 이라고 말했다.

파업으로 주춤했던 은행합병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H증권 은행분석 담당자는 "파업사태 중 주가.자금이탈 등을 통해 시장에서 우열이 판가름난 만큼 파업 불참은행이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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