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좌절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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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금지, 이지민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340쪽, 8900원

독립운동 이면에 남녀의 수선스러운 애정 행각을 끼워넣어 1930년대 경성을 희화화한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로 2000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은 74년생 작가 이지민씨가 두번째 장편소설 『좌절금지』를 펴냈다.

심기일전을 위해 이지형이라는 옛 이름을 묻고 새 이름을 쓰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이씨의 고민이 읽힌다. 내쳐 이씨는 “인터넷 블로그만 들어가도 좋은 글이 넘쳐난다. 그것들이 소설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고 토로한다. 이씨가 블로그 글만 못할 수 있는 소설을 굳이 발표하기로 한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작가가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74년생 동갑내기 주인공들을 내세워 자신도 포함되는 또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두 여주인공 락희와 덕주의 인생은 정확하게 대칭적인 길을 걷는다. 락희는 정점에서 출발하지만 급전직하 지리멸렬한 인생으로, 덕주는 모멸스러운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의 주목과 관심을 받는 신데렐라의 인생으로.

덕주가 신데렐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돈의 위력 때문이다. 타고난 미모로 은막에 데뷔하지만 역시 타고난 바람기와 허영심을 주체하지 못해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다 몰락한 어머니 사미옥은 평생 덕주에겐 증오의 대상이었다. 사미옥은 덕주에게 사생아라는 굴레를 씌웠을 뿐 아니라 뭇 남성을 홀렸던 자신의 미모는 손톱만큼도 물려주지 않았다. 덕주는 점점 웃음을 잃고,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울한 사람이 돼간다. 덕주의 인생 역전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외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다. 덕주건설 대표였던 아버지 박 회장을 압박해 뜯어낸 돈을 불려 장만한 엄청난 재산을 오로지 덕주 앞으로만 상속해 두었던 것이다.

락희화학→럭키금성→LG로 이름을 바꾼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덕에 자신의 이름을 얻은 락희는 일찌감치 또래 가운데서 반짝반짝 튀는 아이였다. 빼어난 외모에 영악한 눈썰미까지 타고난 덕에 락희는 때로는 학교 성적으로, 때로는 대담한 스캔들로 중학교 시절까지는 승승장구한다. 락희의 선민의식이 깨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쪽으로는 평범한 머리임이 밝혀지고 결국 중·하위권 여대에 진학한 락희는 졸업 후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했고, 끝내 벤처사업에 뛰어들지만 결국 자멸한다. 절망 끝에 락희는 깨닫는다. 자신이 십수년에 걸쳐 받은 교육은 그저 하나의 효율적인 보통 시민 양성 프로그램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대립적인 운명의 두 사람은 애증의 관계로 얽힌다. 대박 꿈에 사로잡힌 락희는 돈 냄새를 맡고 덕주에게 접근,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전 남자친구인 관서까지 동원해 사업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사기를 치지만 마지막 순간 탄로가 나고 결국 덕주는 갑자기 서울이 무서워져 지방으로 떠난다.

고통스럽고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이씨는 시종 익살스럽고 능청스럽게 풀어나간다. 때문에 소설은 시트콤 같다. 생사나 명운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심각한 상황도 주인공들에게는 우스개 한마디와 함께 사지선다식 선택을 통해 헤쳐나가야 할 곤경 정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묘미는 결말의 메시지나 시련을 통한 주인공들의 각성에 있지 않다. 여성적인 수다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을 소설은 이씨의 날카로운 눈썰미가 빛나는 대목을 곳곳에 숨겨놓고 있다. 때로 이씨의 눈썰미는 시대적 통찰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뼈있는 재담’을 읽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소설 읽는 즐거움이 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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