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서 방향 튼 자율고 지원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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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자율형사립고(이하 자율고)의 추가모집 합격자 발표를 끝으로 서울지역 전기고교 모집 일정이 모두 끝났다. 올해는 자율고가 추가되면서 학교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중복지원이 가능했던 지난해와 달리 전기고교 전체 중 1곳만 지원할 수 있어 오히려 선택의 기회는 줄었다. 중앙일보 MY STUDY가 단독 입수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특목고 지원 가능권으로 분류되는 중등 내신 상위 10%이내 학생들 상당수가 자율고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상위 5% 이내가 전체의 7% 차지

2010학년도 자율고 일반전형에 지원한 남녀 중학생 1만1092명 중 3699명의 내신 성적을 분석한 결과 상위 5% 이내의 학생들이 262명으로 전체의 7%를 차지했다. 최상위권인 3%이내의 학생들도 144명(전체의 3.39%)이 지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위 5%대의 성적은 흔히 외고·과학고 등 특목고와 민사·상산고 등 자립형사립고 합격 가능권으로 분류된다.

또 상위 6~10%대의 학생들도 459명으로 전체의 12%를 상회했다. 이 성적대의 학생들은 지난해까지 이른바 ‘묻지마 외고 지원’경향을 보이던 학생들이다. 외고 합격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상위권 학생들이 모인 선발집단에 대한 동경으로 ‘일단 지원하고 보자’는 심리가 작용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해 입시에서는 처음 신입생을 모집한 자율고의 영향으로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중동고에 지원해 추첨을 통과한 권오근(배명중 3)군은 중학교 내신 6%대의 학생으로 상산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면서 집 인근에 위치한 중동고가 자율고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지원학교를 바꿨다. 권군의 어머니 김정란(47·대치동)씨는 “상산고가 지방에 위치해 있어 생활 관리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컸다”며 “집에서 가까운데다 자율고 커리큘럼도 아이에게 딱 맞는 것 같아 중동고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산고는 실력으로 합격할 수 있지만, 자율고인 중동고는 순전히 추첨 운에 맡겨야 한다는 점이 불안했었다.

권군도 “오랫동안 준비했던 상산고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자율고로 바뀐 후 첫 신입생이라는 점도 부담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지난해까지는 우리 학교에서 외고 지원자가 가장 많았는데 올해는 나와 비슷한 성적대의 친구들이 중동고나 하나고에 많이 지원했다”고 말했다.

월촌중 김영임 교사는 “입학부터 경쟁이 치열한 외고보다는 전형에 대한 부담이 없는 자율고에 일단 지원하고 보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며 “추첨에서 탈락한다 해도 고교선택제덕에 일반고 중 좋은 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어 굳이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특목고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추첨전형 보완책 마련해 달라"

외고 변화에 대한 불안감도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일정 전까지도 교과부의 고교체제개편안 중 외고의 특목고 지정 취소안이 설득력 있게 논의됐기 때문이다. 불암중의 최용규 교사는 “지원 마지막 순간까지 외고와 자율고를 놓고 고민하던 학생들 상당수가 자율고로 돌아섰다”며 “외고가 존속되더라도 앞으로는 좋은 대학진학 실적을 내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런 가운데 자율고의 추첨전형방식에 대한 불만도 나오고 있다. 김진철(가명·42·반포동)씨는 “내신 3%대였던 아들이 세화고에 지원했다 추첨에서 탈락했다”며 “그날의 운에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는 방식은 자율 경쟁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전형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이번에 본지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한강 이남 지역에 위치한 ‘A’자율고의 합격자 분석 결과 상위 5%대의 학생 중 추첨을 통과한 학생은 10명 중 3명꼴도 되지 않았다. 강북지역의 ‘B’자율고도 5% 이내 상위권 지원자 전체의 1/3정도만 추첨을 통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가람고의 이옥식 교장은 “추첨에서 탈락한 학생·학부모들의 문의전화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추첨전형방식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강북지역의 ‘C’자율고에서 신입생 모집업무를 총괄한 K 교사는 “본교 일반전형에 내신 1% 이내의 최상위권 성적 학생들이 6명이나 지원했지만 추첨에서 단 1명도 통과하지 못했다”며 “학교에도 좋은 학생들을 뽑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신일고 김기훈 교장은 “국민교육공통과정 필수이수 단위를 대폭 줄이고 학생 맞춤형 교과편성이 가능해진 자율고가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며 “그러나 많은 학생들에게 원하는 만큼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탈락한 학생의 학부모에게서 거의 매시간 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세화고의 강헌모 교장은 “사교육을 억제할 방법이 추첨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외고 등에 도입하는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정원의 20%정도만이라도 학교에 선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배려대상자 특별전형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올해 자율고 신입생 전형규정에는 정원의 20%를 사회적배려대상자만으로 선발하도록 했지만 세화고(31명 미달)와 중동고(22명 미달) 등 일부 학교는 추가모집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정원을 크게 밑돌았다. 강 교장은 “일반정원의 경쟁률이 높을 것이라는 판단에 각 중학교를 돌며 사회배려대상자 전형 홍보에만 주력했는데도 결국 미달됐다”며 “부족한 정원을 다른 전형방식을 써서라도 충원하지 못하게 돼있는 제도는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설명]지난 10일 자율형 사립고인 신일고의 합격생 추첨에 쓰였던 초록색 공. 이 추첨에서 검정색과 초록색 두가지 색 중 초록색 공을 집은 학생이 합격의 행운을 누렸다.

< 김지혁 기자 mytfact@joongang.co.kr >

< 사진=최명헌 기자 choi315@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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