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확률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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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국에서 제비뽑기는 점복술(占卜術)에서 비롯됐다. 갑골문이 적힌 가는 막대기를 대나무통에 넣은 뒤 그 중 하나를 뽑아 인간의 길흉과 화복을 점친 것이 제비뽑기의 시초였다.

서양에서 추첨은 본래 분배 수단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클레로스' 라는 제비뽑기로 시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줬다.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이해를 다루는데 그 이상 간편한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로마에서는 공화정 초기 추첨을 통해 관직을 배분하기도 했다. 폭정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는 축제 때마다 제비뽑기로 귀족들에게 토지와 노예를 나눠주는 것을 재미로 삼았다.

16세기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복권제도는 제비뽑기가 상업적으로 발전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당첨금을 지급하는 근대적 방식의 복권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시작됐다.

시(市)재정을 확충할 목적으로 발행된 '라 로토 데 피렌체' 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이탈리아와 유럽 각 도시로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로토' 는 유럽에서 복권의 의미로 굳어졌다.

복권에 재미를 붙인 이탈리아는 1861년 통일을 이룩하면서도 복권을 발행, 세계적으로 국가 복권제도의 원형을 제공했다.

잘 되건 못 되건 '재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제비뽑기의 묘미지만 이는 엄격한 확률게임이다. 서양에서 확률론이 등장한 것은 17세기 중엽 프랑스의 수학자인 파스칼과 페르마가 내기도박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추첨에선 동등한 확률을 보장할 수 있는 공정성이 생명이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궁정 재정 확보를 위해 복권을 발행하면서 자신과 궁정 귀족들이 상위의 당첨금을 독차지하도록 승률을 조작해 국민의 원성을 샀다.

컴퓨터의 등장은 순수한 기계적 확률 게임을 가능케 하는 전기가 됐다. 지금은 학교배정에서 아파트추첨까지 컴퓨터가 이용되고 있다.

컴퓨터 추첨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게 될 이산가족 후보 4백명이 엊그제 1차 선정됐다. 그 중 최종적으로 1백명만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

잡음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택한 방법이 컴퓨터 추첨이라지만 개인의 사정을 무시한 채 기계적 판단에 맡기는 것이 과연 공정한 방법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신청자 7만6천7백9명에 비하면 북한에 갈 수 있는 확률은 0.13%에 불과하다.

방북 대상에 포함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통일을 기다리는 게 빠르겠다는 소리도 들린다. 정말 '통크게' 한 번 해서 이산가족 상봉 확률을 높일 순 없는 것일까.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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