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끼리 서로 돌보며 느끼는 온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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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35면

성탄절 점심 딸아이와 집을 나선다. 내 가방 속에는 딸아이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에게서 빌린 몇 개의 통조림이 달랑거린다. 여행 중인 친구의 빈집에 가는 길이다. 친구는 얼마 전 눈 속에서 떨고 선 아기 길고양이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속에는 빼곡히 고양이의 사진을 저장해 놓고 보는 사람들마다 자랑을 해댔다. 평소에 냉철하기로 이름난 친구는 급기야 “이 고양이를 보고 예쁘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비뚤어진 것이 틀림없는 사람”이라는 극언까지 하며 실추된 이성을 보이기도 했다. 예정된 여행을 가느라 겨우 정이 든 녀석을 떼놓고 떠나는 친구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자칭 고양이 전문가라고 하는 내 딸아이에게 고양이 돌보기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떠난 것이라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딸아이의 아르바이트에 함께 따라간 것이다.

On Sunday 기획칼럼 ‘당신이 행복입니다’

고양이들은 원래 쌀쌀하다. 자기 마음속으로 주인으로 점찍은 사람(딸아이 말에 따르면 그건 사람 생각이고 고양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주인이 돼 주기로 한 그 사람) 외에는 소위 곁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며칠째 빈집에 들어가니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들어서는 기척을 듣고 어딘가로 숨어 버린 것이었다. 넓지도 않은 집 방바닥과 책장 틈까지 다 뒤져 보지만 아기 고양이는 없다. 10여 분을 냉장고 속까지 뒤져 보다가 포기하려는데 문득 눈길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싱크대 위에서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 덕에 몇 번 낯이 익었다고 그래도 하악, 거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매일 먹이를 주러 들르는 딸아이보다 더 나를 반가워했다. 아무래도 친구와 누가 더 가까운지 아는 게 틀림없었다.

가져간 통조림으로 녀석을 유인해 드디어 무릎에 올려놓는 데까지 성공했다. 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떠나면서 안부전화 한 번 없던 친구는 내가 고양이를 방문했다고 문자를 보내자 득달같이 그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 고양이 안부를 10여 분간 숨차게 물어댄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하는 수 없이 내 안부와 메리크리스마스를 겨우 덧붙인다. 크리스마스에도 마감할 원고는 있고 집에 있는 다 큰아들 녀석들은 엄마 언제 오느냐고 10분 간격으로 전화를 해대는데, 그래도 조금 낯이 익다고 어린 고양이가 떠나려는 나를 따라와 현관 앞에서 고개를 한껏 젖혀 빤히 올려다본다. 딸아이는 친구들과 부산히 문자를 주고받다가 늦는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고 친구가 떠난 빈집에 어린 고양이와 나 둘만 있다. 나는 어린 고양이가 또 혼자 될 게 안쓰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나는 고요한 빈집에서 아기 고양이를 안고 비 내리는 성탄절의 창밖을 내다본다. 신기하게도 아기 고양이의 체온은 아주 따뜻했다. 그를 안은 팔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해 온다. 아마 녀석도 제 작은 가슴으로 내 체온을 느끼고 있으리라. 문득 그동안 친구가 불쌍한 아기 고양이를 돌본 것뿐 아니라 아기 고양이 역시 외로운 내 친구를 돌봤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아기 고양이의 체온만큼 따뜻한 것이 내 마음속으로 차오른다. 살아 있는 것들끼리 서로 돌보며 느끼는 체온. 이 겨울 나는 행복해진다.



※ 기획칼럼 ‘당신이 행복입니다’는 이번 호(2009년 12월 27일 제146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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