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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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9. 정처없는 떠돌이

이 곳, 저 곳 정처없이 떠돌던 가운데 대구에서 머물던 중, 예전에 만났던 일본인 여대생과 다시 만나기도 했지만 그 부모가 결혼 허락을 해주지 않아 결국 내가 먼저 끝내자고 했다.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소리는 나에게 애인보다 더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이었다.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단 한시도 잊지 않고 소리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우연히 묵은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정정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나와 있었다. 스승의 임종도 못본 죄인인 나는 그저 때늦은 통곡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쓸쓸히 돌아가신 정정렬 선생의 살아생전 가르침을 생각하니, 소리 공부에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승도 없이 혼자 소리 공부를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던 가운데 우연히 조선총독부에서 배우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무슨 맘에선지 시험을 보러 가게 됐다.

그 연기시험은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닭을 쫓고 다시 잡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내 앞에 시험을 본 사람은 막대기로 땅바닥을 '딱, 딱' 두들기니 심사위원이 대번에 "야메(그만)" 라고 했다. 불합격이라는 것이다.

나는 닭에게 모이를 주는 시늉을 하며 "구, 구" 소리를 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로 공연단을 조직해 중국으로 공연을 가게 됐다. 만주로부터 시작해 상해까지 공연을 하러 갔다.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일제의 자구책이었다.

물론 일제의 공연단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갈 곳 없는 처지에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게 어디냐 했다.

먼저 함흥에 들러 공연을 했다. 판소리가 남도에 근원을 둔 예술이기는 하지만 함경도 사람들로부터도 대환영을 받았다.

그로부터 난징(南京).베이징(北京) 등 중국의 옛 수도들을 돌며 한동안 공연을 하러 다녔다. 수십 시간씩 기차를 타고 추위에 떠는 것은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온갖 고생을 다 했다. 그래도 매일 아침마다 남들이 일어나기 전에 혼자 숙소를 빠져나와 소리연습을 했다.

정정렬 선생의 말씀대로 소리라는 것은 단 하루만 연습을 게을리 해도 대번에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소리 연습을 하려고 새벽녘에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들어갔다. 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온 사방이 쩌렁쩌렁 울리기 때문에 남에게 방해가 안될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숙소에서 꽤 멀리 나왔던 것 같다.

사방이 뿌옇게 안개로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누구냐. " 간신히 시선을 고정시켜 보니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저는 소리하는 사람입니다. 연습을 하러 들어왔습니다만. " 알고 보니 그 곳은 움직이는 물체면 무조건 사살하는 군사지역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순찰하는 군인이 가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조금만 멀리서 나를 봤더라도 일단 총부터 쏘았을 것이다.

결국 "얼른 이곳에서 나가라" 고 호되게 혼난 일로 그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 사건을 떠올리면 죽을 고비를 넘긴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다.

그렇게 고생하며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 막막한 것이 사실이었다. 갈 곳도 없고 스승도 없는데다 권번도 나날이 쇠퇴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단을 도망쳐 나와 중국 어딘가에서 혼자 기반을 잡고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고향에 두고온 부모 형제의 얼굴을 생각하면 나 혼자 잘 살겠다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내가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소리뿐인데, 소리를 버리고 살 자신도 없었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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