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형평성 잃은 공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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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9일 오전 10시쯤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전날밤 귀가했다가 출근한 노조원 10여명이 전경들을 붙잡고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힘없는 여직원들까지 무자비하게 끌고가는 게 과연 경찰이 할 일인가요." 한 여직원의 울음섞인 성토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20일 동안 임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노조에 대한 경찰의 이날 새벽 진압작전이 성공리에 끝나 1천1백여명의 노조원이 전경버스에 실려 연행된 롯데호텔의 모습은 서울 도심의 초특급 호텔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였다.

정문 앞엔 터지고 남은 연막탄 케이스와 산산이 부서진 유리창 파편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 걸음을 옮기기가 거북스러웠다.

노조원들이 농성 중이던 2층 크리스탈 볼룸은 수백여장의 담요와 이불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프런트에선 겨우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온 외국인 투숙객들이 속속 체크아웃을 하고 있었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영업 중인 일급호텔에 경찰이 연막탄까지 쏘며 진입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며 어이없어 했다.

조금 뒤 오전 11시쯤 서울 명동성당. 민주노총 지도부와 롯데호텔 노조원 3백여명이 규탄집회를 갖고 있었다.

단병호(段炳浩)위원장이 "의사한테 뺨맞고 노동자에게 화풀이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라며 읍소하자 지나던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한 노조원은 "엿새동안이나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했던 의료계 집단폐업과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의증 전우회의 언론사 난입 등에는 전혀 힘을 못쓰던 정부가 힘없는 노동자를 희생양 삼아 분풀이에 나섰다" 고 말했다.

이어 "강약약강(强弱弱强), 강한 자에겐 비굴하고 약한자에겐 한없이 강한 게 우리네 행정부"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를 지켜보던 한 30대 회사원은 "아무리 경찰력이 정당하게 집행됐다손 치더라도 형평성을 잃으면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며 "정작 필요할 땐 잠자코 있다가 설득력이 없고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행동을 일삼는 정부가 진짜 개혁 대상" 이라고 꼬집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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