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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순위에 대한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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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선 대학을 풍자하는 농담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대학들의 착각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MIT 학생들은 '자신만은 너드(nerd, 공부만 할 줄 아는 얼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거나 예일대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같은 식이다. 하버드대 근처에 있는 브라운 대 출신자들은 '예일이나 하버드에 전혀 꿀릴 게 없다'고 주장하고, 의과대학으로 유명한 존스홉킨스대 입학생들은 모두 자신을 의대지망생이라고 소개한다. 캘리포니아공과대(Caltech) 학생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네 학교를 알 거라고 믿고 있으며, 남부의 명문 듀크대 사람들은 '자신들은 아이비리그에 안 갔다고 주장한다'는 것도 미국 대학들의 대표적인 착각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의 많은 대학이 갖고 있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대학이 상위 20개 대학 안에는 든다'는 주장인데,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개 대학을 뽑는다면 끄트머리 어딘가에 우리 대학도 꼽힐 것'이라고 믿는 대학이 적어도 50개 학교는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해서 '왜 우리 대학을 비하하느냐'고 반박하거나,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런 농담들은 모두 웃자고 하는 얘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학들의 착각 시리즈 속에는 그 대학 출신들이 갖고 있는 지나친 학벌주의를 풍자하자는 목적도 있다. 예일대생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봐서는 안 될 것이며, 브라운대는 아이비리그에 속해 있다고 해서 안일하게 명성을 쌓아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게다. 존스홉킨스대 학생들은 의대의 명성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되며, 듀크대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에 너무 열등감을 가질 필요 없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하는 것이다.

중앙일보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대학평가 기사를 요즘 유심히 보고 있다. 좋은 순위를 얻기 위해 그동안 대학들은 얼마나 많은 자료를 제출했을 것이며, 평가결과를 보면서 얼마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생각보다 순위가 낮게 나온 대학은 채점 기준에 불만도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순위가 높게 나온 대학들은 벌써부터 높은 순위가 나온 부문을 학교 홍보물에 넣어 인쇄하는 작업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중앙일보에서 실시한 대학 평가를 보면서 '대학들의 착각 시리즈'가 떠오른 이유는 우리나라 명문대들이 혹시 이런 착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들은 "대학평가 결과가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대학 서열을 절대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서울대의 평가 순위가 아무리 낮게 나와도 '사람들 머릿속의 한국 최고 대학'은 늘 서울대일 것이며, 다른 대학이 아무리 뒤쫓아 와도 서울대 뒤엔 연세대와 고려대가 굳건히 버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명성에 비해 대학평가 순위가 10년쯤 낮게 나오면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해서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는 법이 없다고 했으니, 투자와 노력을 게을리하면 이름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따라서 명문대학들은 이름에 걸맞은 연구와 교육을 해야 할 것이며, 열심히 노력한 대학들은 좋은 평가를 통해 고정된 대학서열을 깨고 명문대학으로 급부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들도 어떤 대학이 열심히 연구하고 좋은 교육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막연한 명성에 의지하지 말고 대학평가를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 있는 대학은 졸업생들이 잘 끌어주겠지.' 이것이 바로 '학부모의 착각시리즈' 제1탄이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시스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