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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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소풍 가기 전날의 저녁엔 그냥 들뜨기 마련이다. 내일 아침에 혹시 비라도 오지 않을까 이미 날 저문 창문 밖을 자주 내다본다. 설레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잠을 설치다가 하늘이 부옇게 변한 것을 보고 짧은 잠자리에 들었던 추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큰 행사를 하루 앞에 둔 날은 이렇듯 기대와 설렘으로 지새기 마련이다. 서양에서는 큰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전날 저녁에 성대한 파티를 연다. 규모를 갖춘 행사라면 반드시 하루 전 저녁에 전야제(前夜祭)가 열린다. 본 행사보다 더 요란하게 펼쳐지는 게 다반사다. 그래서 저녁을 뜻하는 영어 이브닝(evening)을 축약한 이브(eve)는 훌륭하고 기대되는 행사 전의 파티와 축제라는 뜻과도 통한다.

일반 전야제에서는 풍성한 볼거리가 등장한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불꽃놀이, 대중 스타들이 동원된 대형 호화 공연이 펼쳐져 다음 날 행사를 앞둔 현지의 분위기를 최대한 고조시킨다.

동양에서는 경건함으로 ‘내일’을 맞이하는 게 보통이다. 전야는 흔히 전석(前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에 따르는 석생(夕牲)이라는 말이 있다. 다음 날 치르는 신과 조상에 대한 제례(祭禮)를 앞두고 전날 저녁에 그에 바칠 소와 돼지·양 등 희생(犧牲)의 상태를 살피는 일이다. 희생을 큰 받침대 위에 올려 놓은 뒤 동물의 털 상태와 건강 여부 등을 면밀하게 점검한다.

제사를 앞둔 동양인의 마음 상태는 이렇다. ‘전날 저녁에 희생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고, 날이 밝을 무렵에 희생을 담은 그릇을 받들어 나간다(前夕視牲, 質明奉俎)’는 식이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민간의 시구(詩句)다.

물론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직전의 불길함을 뜻하는 ‘폭풍 전야’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전야와 전석은 대개 다음 날의 행사를 잘 치르기 위해 제 자신을 돌아보고 여러 준비 상황을 차분하게 따지는 날이라는 뜻이 강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인류가 만들어 낸 전야 행사로는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는 날이다. 이 땅에 예수가 태어난 의미를 다시 살피고 마음속에 되새기는 날이다. 사랑과 봉사, 가없는 이타(利他)의 정신을 예수는 가르쳤다. 늘 이날은 찾아오지만 그 정신은 쉬이 구현되지 않는다. 떠들썩한 행사보다는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지난 1년의 내 삶을 반성하며 이웃의 처지를 함께 돌아볼 일이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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