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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지켜라” 낙동강 전선 사수한 워커 장군 서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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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더 이상의 철수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워커라인(Walker Line)이라고도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 인천 상륙작전의 발판을 만든 6·25전쟁 영웅 워커 장군.

6·25전쟁 초반 영덕에서 마산까지 이어지는 240㎞(남북 160㎞, 동서 80㎞)에 달하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인천 상륙작전의 발판을 만든 주한 미8군 사령관 워커(Harris Walton Walker·1889~1950). 그는 1950년 7월 13일 이 땅을 밟았다. 북한군의 파상공세로 전황이 매우 불리하던 7월 29일 상주를 지키던 미 제25사단장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죽음으로 지키라(Stand or Die).” 그날 현지로 달려간 그는 사수(死守) 훈령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북한군이 먼저 부산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맥아더 원수가 보내기로 한 증원 병력이 먼저 도착하느냐가 문제이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철수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포로가 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 한 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양보하는 일은 수천 명에 달하는 전우의 죽음에 대해 보답하는 길이 못 된다”(김행복, 『한국전쟁의 전쟁지도』). 그때 전쟁의 중심에 버티고 서 있던 그의 사전에 후퇴란 없었다(Not a step back).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라는 군가는 “죽음으로 지키라”는 워커의 불퇴전의 비장한 결의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롭던 신생 대한민국을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 올렸다. 그때 그는 우리와 함께 있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전세가 중국군의 개입으로 수세로 전환한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둔 그날. 그는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수훈을 세운 자신의 외아들 워커 대위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 중 의정부 북방 축석령 부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향년 61세의 삶을 마쳤다.

우리는 주한미군 휴양시설이 들어섰던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언덕을 ‘워커힐(Walker Hill)’로 이름 지어 그를 기린다.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워커힐 호텔 본관 정면 산자락에 세워진 추도비문은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