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내부 보고서] "삼성전자 외국자본에 뺏길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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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정부가 추진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에 휘말릴 경우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검토 보고서를 최근 작성했다. 본지가 22일 입수한 이 내부 문건은 "(개정안의 주요 내용인)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묶는 방침이 철회되지 않는 한 거대한 외국자본과 싸우기는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재계에선 "경영권이 불안한 상황에서 어느 기업이 과연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할 수 있겠느냐"며 "정부가 재벌 기업들에서 세금을 더 많이 걷되, 경영권은 확실히 보장해 주는 유럽식 모델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등의 지적을 하고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당초 정부.여당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한나라당과 재계의 반발로 공청회를 한 뒤 처리하는 것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 적대적 M&A 시나리오=삼성전자는 지난해 43조원의 매출에 6조원의 순익을 냈다. 순차입금은 오히려 마이너스며, 8조원의 현금을 쌓아놓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대단히 매력적인 M&A 대상으로 꼽힌다. 보고서는 "외국계 10대 주주들이 정보 교환 등 잦은 교류를 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면서 "적대적 M&A가 시작되면 이들은 바로 결집할 것이며, 다른 외국 주주들도 주가 상승을 기대해 적극 가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적대적 M&A가 일어날 시기는 '경영이 부진할 때'로 보고 있다. 그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는 외국인 주주들이 삼성전자 이사회를 장악하는 방식이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인물을 최고재무경영자(CFO)로 선임해 관리.예산권을 장악한 뒤, 우호적인 사외이사 비중을 높여 이사회를 장악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보고서는 또 "만약 이것이 제대로 안 될 경우 외국인 주주들은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셋째는 적대적 M&A가 가능하다고 예상한 외국의 전문가나 경쟁업체들이 공개매수에 나서는 방식이다. 문건은 "미 월스트리트에서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3분의 1가량인 200억달러(23조원) 정도를 모으는 것은 '하룻밤 게임'에 불과하다"며 "공개매수에 성공하면 이들은 삼성전자의 사업부를 나눠 팔고 뉴욕 증시에 상장해 주가를 끌어올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삼성전자를 해체한다는 뜻이다.

◆ "손을 쓸 방법이 없다"=삼성그룹의 의결권을 15%로 제한하면 "M&A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 삼성전자의 결론이다. 이건희 회장 등 오너 일가와 그룹 계열사들이 행사할 수 있는 삼성전자 의결권은 지난해 말 현재 22% 남짓 된다. 주식 지분율은 18.6%지만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기 때문에 실제 그룹의 의결권은 이보다 높아진다. 미국 씨티은행과 캐피털 그룹 등 외국인 10대 주주도 주식 지분율(18.3%)이 삼성그룹과 비슷해 22%가량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의 의결권은 15%로 묶인다.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들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8.3%)은 거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주주들의 의결권은 그대로 인정돼 삼성은 외국인 10대 주주에 비해 7% 이상 의결권 있는 주식이 모자라게 된다.

물론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오너 일가와 비금융 계열사를 동원해 삼성전자 주식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8%를 더 사들이려면 약 7조원이라는 큰돈이 필요하다. 더구나 삼성 계열사들은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금지 조항에 걸려 삼성전자 주식을 많이 살 수가 없다.

보고서는 또 "외국인 주주의 의결권은 69%(지분율은 57.3%)로 국내 기관과 개인 등 국내주주들의 의결권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국내 우호지분을 모아 외국인 투자자와 싸우기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 삼성을 겨냥한 입법인가=공정거래위원회는 "M&A 위협이 현실화되면 그때 가서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을 풀면 된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불가능한 얘기"라고 반박한다. 의결권 제한을 푸는 것도 국회 의결 사항이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강화는 삼성만을 겨냥한 입법"이라는 지적도 한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인 49개 기업 집단에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지만 현대자동차.SK.한화그룹 등은 오너 일가와 비금융 계열사의 출자 비율이 높아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런 점을 들어 공정위는 "개정안이 업계에 미칠 파장이 크지 않다"고 주장하고, 참여연대 측은 "의결권 제한을 완화하자는 것은 삼성에 특혜를 주자는 얘기"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삼성전자 측은 "법과 정책은 보편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며 "결과적으로 한 그룹만을 겨냥한 입법을 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김영욱 전문기자

◆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인 그룹의 금융계열사는 자신들이 주식을 갖고 있는 다른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을 지분만큼 행사하지 못하도록 강화했다. 즉 금융계열사들은 그룹 오너 등의 소유 지분과 합쳐 자회사에 대한 의결권을 15% 이상 행사할 수 없도록 했다. 물론 오너와 비금융계열사들의 의결권이 15%를 넘을 경우엔 그대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 경우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은 0%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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