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유라시아가 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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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사람은 이해(理解)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국이 무슨 소용인가" 라고 말했다.

당장은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는것,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 꿈 같은 미지의 것에 도전할 때 발전이 있다.

부산이나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대륙이나 시베리아를 횡단해 유럽의 파리.리스본.런던에 닿는 것이 아직은 상식의 수준을 넘는 꿈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에게 닫혀 있던 북방대륙이 하늘을 통해 열린 것만 해도 감격적인데 육로로 유라시아대륙을 달린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국에서 중국.시베리아.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를 거쳐 서유럽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은 남한과 유라시아대륙 사이에 북한이라는 금단의 구역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화해로 대륙으로 향하는 북한의 빗장이 풀릴 전망인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귀국보고에서 우리의 꿈을, 그리고 좀 사치스럽지만 낭만을 가장 예리하게 자극한 대목의 하나는 남북한 철도를 연결해 새로운 천년의 실크로드를 연다는 구상이다.

金대통령의 말대로 우리가 기차로 런던과 파리에 가지 못하는 것은 경의선과 경원선이 끊겨 있기 때문이다.

金대통령은 남북한의 철도를 연결하면 유라시아대륙과의 교역에서 운송비가 30% 절감되고 수송날짜도 크게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한반도와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대는 두만강지역 일대를 일본까지 참여하는 물류센터와 경제특구로 개발하는 것은 이제 한민족의 '이해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주석도 말년(末年)에 남북한 철도연결에 비상한 흥미를 가졌었다.

그는 1994년 외빈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한의 철도가 연결되면 남한으로 가는 중국 상품을 날라다 주고 1년에 4억달러, 러시아와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수출하는 물자를 두만강역에서 받아 동해안의 철길로 날라다 주고 1년에 10억달러를 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철도의 전체 길이는 남한의 80% 정도로 양적으로는 크게 뒤지지 않지만 선로가 낡아 시속 20~30㎞의 속도밖에 못내고, 철로의 90%가 단선이고 남한과 궤도가 달라 호환이 안된다.

그래서 남북한 철도의 연계운영을 위해서는 새로운 투자가 필요하다.

다행히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ESCAP)가 한반도 철도연결사업이 포함된 아시아횡단철도 북부노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남한-북한-중국-러시아-유럽을 잇는 꿈같은 노선이다. 바로 21세기판 '실크로드' 다.

한반도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은 세계인구의 75%, 전세계 국민소득(GNP)의 60%, 확인된 에너지 매장량의 4분의3을 갖고 있는 지(地)경제학적 심장부다.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지방의 천연가스와 석유 매장량은 쿠웨이트, 멕시코만과 북해의 그것을 능가한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미국과 유럽공동체, 러시아 사이에 이권다툼이 치열하다.

체첸사태와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규도 에너지 이권과 직결돼 있다.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투자에는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이 든다. 그러나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가 정착되면 절약되는 안보비용도 적은 규모가 아니다.

철도연결이 완급(緩急)의 순서에서는 에너지.항만.도로의 뒤가 될지 몰라도 늦어도 21세기 중반 이후 코리안들의 생활공간과 의식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넓히는 데는 철길을 따라 유라시아로 진출하는 새 천년의 실크로드를 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로운 남북관계의 전개로 우리는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유라시아대륙 진출의 꿈이 공상일지 몰라도 그것은 실현가능한 코리안 드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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