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의료개혁] 1. 가상 상황으로 본 문제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의약분업 D-11일. 그러나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 속에 의사들은 집단 폐업을 결의했다. 벌써부터 병원마다 환자들과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약국에서는 약 사재기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실제 병원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의약분업은 정부가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의료개혁 차원에서 30년 동안 추구해 온 과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처방은 없는지 진단한다.

◇ 약 찾아 헤매는 낮〓뇌졸중을 앓고 있는 金모(77.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씨는 16일 오전 동네 J의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받았다.

의사가 처방한 약은 무노발.아스트릭스.카펜탈.알마틴.시메티딘 등 다섯가지.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S약국에 처방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다섯가지 중 시메티딘만 갖추고 있어 조제할 수 없었다.

약국측은 "현재 구비하고 있지 않은 나머지 네가지는 자주 쓰지 않는 약이어서 의약분업이 시행돼도 조제하기 힘들 것" 이라고 말했다.

金씨는 인근 P약국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사정은 마찬가지로 시메티딘만 있었다. 오르막길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 15분 만에 동네 E약국에 도착했다. 약사는 "무노발은 신약이고 알마틴은 전체 약품 목록에도 없는 약이다. 이들 '저빈도 약' 을 한두개 팔기 위해 갖출 수는 없다" 고 말했다.

金씨는 배송센터(도매상) 두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두 회사는 "네가지 중 세가지는 이달 말까지 갖출 수 있지만 알마틴은 구매 목록에 없어 보유하기 힘들며 주문할 경우 3~4일은 기다려야 한다" 고 대답했다.

만성위염으로 고생하던 張모(29.여.서울 은평구)씨는 16일 오후 S대학병원 내과에 들러 진찰을 받은 뒤 처방전을 받았다. 처방약은 잔탁.미란타.레보프라이드.토피스.베아제 등 다섯가지.

병원 근처 약국 세곳을 20분에 걸쳐 돌아다녔지만 잔탁.베아제.미란타 등을 제외한 약 두가지는 구비하고 있지 않아 처방전 대로 약을 지을 수 없었다.

동네 약국 두곳에서도 결과는 똑같았다. 처방전을 받은 한 약사는 "토피스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방전을 받은 지 1시간30분이 넘었고 張씨는 발품을 파느라 지칠 대로 지쳤지만 결국 원하는 약을 살 수 없었다.

◇ 치료할 곳 없는 밤〓의약분업 첫날인 7월 1일 오후 10시, 회사원 崔모(30.서울 서초구 서초동)씨는 신촌의 한 술집에서 친구와 다투다 얼굴을 심하게 다쳤다. 인근에 문을 연 의원들이 없어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X레이를 찍는 등 응급처치를 받았다. 원무과에서 계산을 하던 崔씨는 청구서에 응급실 사용료가 3만원이나 찍혀 있어 놀랐다. 정부가 응급증세로 인정하지 않는 '비응급환자' 에게 새로 생긴 부담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비응급환자는 병원에서 약을 탈 수도 없었다. 崔씨는 자정이 넘어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주변의 약국 여섯 군데를 1시간이 되도록 돌아다녔지만 모두 문을 닫았다.

집 주변 약국 두군데도 문이 닫혀 있었다. 상처 부위가 부어오른 崔씨는 밤새 고통 때문에 잠을 설치다 다음날 오전 9시쯤 약을 지을 수 있었다.

劉모(72.여.서울 은평구 역촌동)씨는 갑자기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해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에 서울대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정밀검사를 해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지만 담도가 막혀 있다" 는 당직 의사의 1차 진단. 처방전을 받아 약을 타려고 하니 "비응급환자이므로 응급실에서 약을 탈 수 없으니 약국으로 가라" 고 했다.

劉씨는 "숨을 쉴 수가 없어 곧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냐" 며 항의했지만 "병원 규칙상 어쩔 수 없다" 는 말만 들었다.

병원 옆 약국 세군데는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딸의 부축을 받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역시 동네 약국의 셔터는 모두 내려져 있었다. 劉씨는 답답한 가슴보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움말 주신분

조재국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조정실장, 원희목 대한약사회 총무위원장, 김방철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 김병익 성균관대 교수, 강창구 건강연대 정책실장, 신석우 제약협회 전무, 이덕승 녹색소비자연대 사무총장, 이강원 의약분업 정착을 위한 시민운동본부 사무국장, 이재선 현대 메디칼 S.E. 대표이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