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100년, 부패 척결의 새 전환점 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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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호 35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새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역사는 ‘과거가 현재에게 들려주는 대화’이다.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내년 8월 29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는 주장도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에는 여러 가지 인과가 있겠지만, 당시를 지켜본 서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런던 데일리 메일’ 극동특파원이던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 1908)』에서 조선 망국은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에 따른 필연이지 결코 일본만을 탓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고종의 밀사로 활동한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서 구한말 지배계급의 부패와 농민 수탈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관직은 일반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파는데 도의 관찰사는 미화 5만 달러, 방백 수령은 500달러 정도다. 돈과 권력은 사실상 동의어로 재판도 뇌물 액수에 따라 결정되고, 영향력을 가졌거나 돈을 가진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유리한 판결이 내려진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유명한 여행 작가 이사벨라 비숍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에서 비슷한 소감을 피력했다. ‘조선의 관리에게는 청렴결백의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국리민복에 무관심한 채 개인의 치부에만 주력하고 탐욕은 억제할 길이 없다. 과거제도는 뇌물, 흥정, 매관매직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공직 임명 기능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외국인의 피상적 관찰이라 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부패 상황을 과장하면서 “극소수 흡혈귀 계급을 제거하고 피압박 조선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국권 침탈을 정당화하려 했다. 조선이 부패했기 때문에 일본의 합병 통치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논리는 국제사회에서 먹혔다. 합병 과정에서 주변의 어느 나라도 일본을 비난하지 않았던 슬픈 역사의 이면에는 그런 사정도 있었다.

우리는 해방 이후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부패 척결을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서정쇄신, 특명사정반, 범죄와의 전쟁, 금융실명제, 수차례의 특별검사제 등 끊임없는 시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사회가 많이 깨끗해졌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4~5급 공무원들이 부패·비리 혐의로 구속되면 일간지 사회면 톱기사를 장식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르다. 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현직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을 수사했지만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언론과 사회의 감시망이 촘촘해졌고 누구라도 범죄 혐의가 드러나면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평가는 아직 차갑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09년도 국가별 부패 인식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80개국 중 40위,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30개국 중 22위다.

최근까지 고위 공직자의 뇌물이나 권력형 비리, 재벌의 비자금 조성 등이 계속 적발돼 온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패 척결이 강화될수록 부패 인식 지수가 높아지는 딜레마는 있다. 하지만 아직은 깨끗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살아본 한 미국 변호사는 온정주의적 처벌을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미국은 고위직일수록 처벌이 무거운데 한국은 오히려 ‘국가 봉사나 사회 기여’ 등을 이유로 고위직이 가볍게 처벌되는 것을 이상하게 느끼는 것 같다. 엄격한 처벌은 정부와 사법체계의 신뢰에 직결되는 만큼 예외나 특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우리가 100년 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비상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국치 100년을 맞아 G20 정상회의라는 큰 국제행사를 개최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런 시기를 맞아 검찰과 경찰은 각종 부정부패를 철저하게 수사하고, 법원에서는 엄정하고 신속하게 처단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전기가 되면 좋겠다. 형사사법 시스템을 정밀하게 재점검해서 그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면 전면 재설계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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