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11)은 콩고민주공화국 난민의 아들이다. 지난해 아빠가 난민 지위를 얻게 되면서 한국에 와 살게 됐다. 가난에 힘겨운 삶을 살고 있지만, 얀은 밝았다. 눈에는 생기가 있고 진지했다. 사진 왼쪽은 17일 인천의 집에서 함께한 콩고 출신의 난민 얀(왼쪽)과 아버지. [강정현 기자]
얼굴이 검어서 도드라져 보이는 큰 눈, 곱슬 머리, 웃으면 하얗게 드러나는 이. 얀(11·가명)은 난민의 아들이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6월부터 한국에서 살게 됐다. 1년 반밖에 안 됐지만 얀은 한국말을 대부분 알아듣는다. 콩고는 프랑스어를 쓴다.
얀의 아빠(43)는 콩고의 정보기관에서 일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반정부 인사를 돕던 그는 2002년 체포됐다. 옛 동료의 도움으로 아빠는 탈옥했다. 가짜 여권으로 중국에 입국해 한국 대사관을 찾았다. 아빠는 난민신청을 한 뒤 6년을 기다렸다.
그 6년간, 얀의 가족은 콩고의 빈민촌을 전전했다. 엄마(38)와 얀, 그리고 동생 둘까지 네 식구가 전기도 수돗물도 들어오지 않는 판자촌에서 살았다. 엄마는 디스크와 우울증, 그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었다. 아빠가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게 된 후, 지난해 6월 가족은 콩고를 빠져 나왔다. 얀의 가족은 한 교회의 도움으로 인천의 다세대주택에 살게 됐다. 59㎡(약 18평) 정도의 낡은 집은 다섯 식구에겐 좁았다. 그러나 밤에도 불을 켤 수 있고 언제나 물이 나오는 수돗물이 얀은 신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지난해 여름 어느 날. 치안센터에서 집으로 연락이 왔다. 얀이 아이들과 싸웠다고 했다. 아이들이 얀의 피부색에 시비를 걸었다. “아프리카가 집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얀은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그들의 말이 욕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이런 일은 몇 차례 더 있었다. 부모는 교회와 상의 끝에 신도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초등학교로 얀을 입학시켰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가난해요”라고 얀은 말했다. 친구의 넓은 집과 먹을 것이 가득한 냉장고를 보고 일기장에 썼지만, 그걸 부모에겐 말하진 않았다. “철이 너무 빨리 들어버렸다”고 시민단체 ‘피난처’ 이호택 대표가 말했다.
얀은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야 한다. “친구들처럼 5학년에 다니고 싶다”는 게 이유다. 얀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다면 한국어 선생님을 받고 싶다”고 했다. 방에는 ‘한글 자음·모음’이 쓰여 있는 그림판을 붙여 놓았다. 그림판 옆에 가족의 이름을 한글로 써놨다. 얀은 공부할 방법을 스스로 찾았다.
얀은 “(콩고보다) 한국이 더 좋다”고 했다. “여기에 살고 싶어요”라고 말할 땐 진지했다. 얀에게 ‘한글’은 처음으로 배운 문자였다. 글을 익혀 학교를 마치고 꿈도 이루고 싶다. 그러나 얀의 국적은 콩고다. 난민인권센터 김성인 사무국장은 얀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한국에서 평생 살기도 어렵다.”
정선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