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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과 이응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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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004년 세계 미술계는 스페인이 낳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탄생 100년을 축하하는 전시회로 떠들썩했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돈과 명성을 거머쥐고 스타가 된 그를 위해 스페인은 올해를 '달리의 해'로 정하고 푸짐한 행사를 치르며 문화대국임을 자랑했다.

탄신 100년을 맞은 걸출한 화가는 한국에도 있다. 내고(乃古) 박생광(1904~85)과 고암(顧菴) 이응노(1904~89)다. 달리만큼 세속적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어도 한국 현대미술사가 손꼽는 화가들이다. 하지만 두 인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인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사립미술관과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민간 차원의 기념전 외에 이들을 기리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두 화가는 한국 화단에서 일종의 이단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평생을 '일본색' 혐의를 쓰고 지방을 떠돌던 박생광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절규하듯 한국 고유의 채색을 흐드러지게 꽃피우며 구원받았다. 만년의 박생광은 식민지 미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 채색화와 역사화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인정받는다.

이응노는 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눈을 감을 때까지 국가보안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는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야 살 길이 있으며 통일을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발 벗고 나설 용의가 있습니다. 예술이란 뿌리 찾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란 사람이 만든 제약일 뿐이지요"라고 항변했으나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타계했을 때 한국 정부는 조화 하나 보내지 않았다.

내고와 고암은 참으로 한민족 전통 미술의 우수함을 보여준 화가였다. 하나 일제강점과 분단시대의 한반도는 그들에게 그림조차 제대로 그릴 수 없게 만들었다.

고암의 유족은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 미술관을 짓고 파리에서 가져온 그의 유작을 갈무리해 왔으나 조국의 냉대와 무관심에 지쳐 철수할까 고민 중이라고 한다. 소장품을 고암의 예술세계를 인정해준 프랑스로 다시 가져 가겠다는 것이다.

두 화가의 탄생 100년을 맞아 '박생광의 해'와 '이응노의 해'를 마음껏 축하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착잡하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