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자기 당과 싸우는 고이즈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7면

그림밟기란 뜻의 '후미에'(踏み繪)란 용어가 일본 정가에서 회자되고 있다. 17세기 일본의 막부가 기독교도를 가려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을 밟고 지나가게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편가름을 강요할 때 자주 인용된다.

미주를 순방 중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23일 '후미에 개각'을 귀국 후 단행할 것이라고 거듭 예고했다. "(내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은 내각.당직개편 때 등용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데 이어 19일엔 "여태까지 반대했더라도 지금부터 찬성하면 된다"고 말했다.

찬반의 잣대는 '고이즈미 개혁의 종착점'이라 불리는 우정 민영화 정책이다. 그는 미주 출발 직전 우정민영화 기본안을 내각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우정공사는 3대 메이저 은행의 수신고를 합한 것보다 많은 예금을 보유하고서도 돈 쓸 줄을 몰라 놀리고 있다. 이를 민영화해 효율적인 자금 흐름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당인 자민당의 거센 반대를 받고 정부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주요 정책 결정에 앞서 정부.여당이 사전협의를 통해 합의안을 만들어 내는 불문율을 깨야 했다. 자민당은 방방곡곡에 촘촘히 깔아둔 우체국 조직망을 배경으로 선거 때마다 '집표 기계'역할을 해 온 우정공사를 놓칠 수 없는 입장이다. 막후엔 우정공사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받고 이해를 대변해온 '우정족(郵政族)' 의원들이 있다.

고이즈미에게 우정 민영화는 물러설 수 없는 승부수다. 2001년 취임 때부터 외친 '성역없는 개혁'은 '철학없는 개혁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들어 왔다. 때문에 우정 민영화를 계기로 자신의 개혁성향을 최대한 부각해 인기를 만회한다는 전략이다. 만약 국회 통과가 좌절되면 중의원 해산을 통해 국민의 신임을 묻는 극단적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고이즈미에겐 우군이 없다. 대학 교수 출신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재정경제상만이 외롭게 그의 편에 서 있다. 자민당 총재인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을 상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예영준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