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수명의 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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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선 세종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민대생(閔大生)이 나이 90세 되던 해 정월 초하룻날 일가.자손들의 세배를 받고 있었다. 한사람이 절하며 "백세향수(享壽)하십시오" 라고 덕담했다.

민대생은 "이제 십년밖에 더 살지 말란 말이냐" 고 화를 벌컥 내며 그를 쫓아냈다. 다음 사람이 나서서 "백세향수 하시고 또한번 백세향수 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그래, 수(壽)를 올리려면 그렇게 해야 도리지" 라며 기뻐하더라는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실제 장수하는 사람은 선천적 요인 외에 본인의 노력도 만만치 않다.

맥아더의 주치의를 지낸 캐나더 중령에게 누군가가 "환자일 때의 맥아더는 다루기 좋은 사람인가" 고 묻자 그는 "모르겠다. 앓는 일이 없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스스로도 회고했듯이 절식(節食)했고 1941년 미 극동군 사령관으로 현역에 복귀한 이후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파이프 담배도 과하지 않게 즐겼고 일과가 끝나면 아무리 골치아픈 업무라도 일단 잊었으며, 누우면 즉시 잠드는 체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한 체질이라도 그 몸을 강도짓 같은 데 쓴다면 차라리 병약한 편이 나을 것이다. '너 태어날 때 주위는 기뻐하고, 너 세상을 떠날 때 주위는 울고 너만이 미소짓도록 하라' 는 인도 격언은 삶이나 건강의 질(質)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개인의 건강은 또 그가 속한 사회의 소득.문화.의료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일 연구팀이 최근 이집트 고왕국시대의 수도였던 룩소르에서 발굴한 유해 4백여구를 조사한 결과 평균수명이 20~30세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됐다.

에이즈와 내전으로 인해 아프리카 일부 지역은 최근 10년 사이에 평균수명이 10~15년이나 짧아졌다고 한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97년 기준으로 74.4세. 그러나 지난 4일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건강수명' 은 62.3세로 조사대상 1백91개국 중 81위였다. 건강수명은 단순히 살아 있기만 하면 계산에 넣는 종래의 평균수명과 달리 질병.신체장애 여부 등 건강의 질을 따진 통계다.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일본.미국.영국 등은 7~8%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무려 16.3%나 된다. 내란.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남부의 25%대보다는 낫다지만 여전히 선진국과는 질적인 차이가 뚜렷함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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