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식탁 위의 태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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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국의 극작가 겸 정치가였던 리처드 셰리던(1751~1816)은 술병을 '식탁 위의 태양' 이라고 불렀다.

술의 도움 없이는 어떤 산해진미(山海珍味)도 그 자체로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술병이 한바퀴 빙 돌고나야 비로소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도 덩달아 빛나게 된다는 거였다.

그가 묘령의 여가수와 사랑에 빠져 두 번이나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술이라는 태양 빛 탓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인체에 알콜이 들어가면 뇌의 각 부위가 영향을 받게 된다. 대뇌의 전두엽이 영향을 받으면 논리적 사고력이 저하되고 두정엽에 영향이 미치면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게 된다.

브로카영역에 알콜 기운이 스미면 혀가 꼬부라지고 번연계에 닿으면 감정이 격해진다. 소뇌가 영향을 받으면 걸음걸이가 팔자로 변한다.

알콜이 뇌의 어느 부위에 더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이 제각각으로 나타난다.

그중 '필름' 이 끊겨 인사불성이 되는 '블랙아웃' 은 대뇌 해마 부위의 신호전달 메커니즘이 고장나 생기는 현상이다.

일종의 단기 입.출력장치 이상으로 컴퓨터로 치면 램 고장이다. 그렇더라도 뇌에 저장된 정보를 꺼내 쓰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집은 찾아갈 수 있다. 다만 술자리에서의 '그 때' 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다들 신사로 술자리를 시작하지만 곧 예술가가 되고 다음엔 투사로 변하며 마지막엔 동물로 끝난다는 서양의 우스개가 있다.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다음엔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얘기도 있다.

'술은 들어가고 망신은 나온다' 느니 '술잔은 작아도 빠지면 죽는다' 는 우리 속담도 있다.

'싫은 밥은 있어도 싫은 술은 없다' 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게 술이라는 경구들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은 술을 일러 적당히 마시면 백약지장(百藥之長)이지만 지나치면 백독지장(百毒之長)이라 했다.

술을 잘못 마셔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많다. '부적절한' 술판을 뒤늦게 후회하고, '필름 절단사고' 로 인한 순간적 실수라고 변명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술은 비와 같아서 진흙에 내리면 진흙탕을 만들지만 옥토에 내리면 꽃을 피운다. 술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마실 때 진가를 발휘한다.

"얼큰히 취하는 사람이 최상의 술꾼이다." 중국의 지성 린위탕(林語堂)의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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