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별세한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 폴 새뮤얼슨 교수의 마지막 인터뷰 육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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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의 경제학자”, “살아 있는 경제학 교과서”라고 불리는 폴 새뮤얼슨 교수와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것은 중앙일보·중앙Sunday였다. 지난해 9월 월스트리트발(發) 금융위기 직후였다. 학문적으로나 현실 경험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9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수석석좌교수(institute professor)로 있는 MIT 연구실에 아침 일찍 출근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5년 후, 10년 후 논하게 된다면...”이라고 말하며 최소한 10년은 더 계속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었다. 많은 한국인 제자를 배출한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새뮤얼슨 교수는 특히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기업가정신을 높이 샀다. 그는 다만 한국경제의 지나친 수출의존성과 성장제일주의에 대해서는 애정이 담긴 충고를 했었다. 다음은 2008년 9월 28일 중앙SUNDAY에 게재됐던 기사 전문이다.

▶폴 새뮤얼슨 교수의 마지막 인터뷰 육성소리

“미국 경제 우편향, 월가 규제 너무 푼 게 화근”‘

살아있는 경제학 교과서’ 새뮤얼슨 교수가 본 글로벌 금융위기

미국발(發)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큰 문제에는 큰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현자가 필요하다. 미국 주류 경제학의 주축을 이루며 ‘20세기 경제학의 아버지’로 부를 만한 폴 새뮤얼슨 MIT 석좌교수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0년)인 그는 93세의 나이에도 경제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등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뮤얼슨 교수에게 월스트리트 금융위기의 원인부터 물었다. 그는 미국의 금융 규제 시스템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80년대 이후 미국 경제는 지나치게 우(右)편향돼 규제가 과도하게 풀렸다. 최근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분별한 규제 철폐가 가장 큰 화근이었다. 나는 70년 동안 경제학과 경제사를 연구했으며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도 체험했다. 이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도주의’가 최상이라는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은 ‘변화를 위한 선거’라고 한다. 차기 미국 대통령은 어떤 변화를 이끌어야 하나.

“경제 운용을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옮기는 것이다. 경제 행위자 간의 ‘견제와 균형’이 복원돼야 한다. 지금의 자유방임주의를 그대로 둘 수 없다. 지나치게 확대된 로비스트들의 영향력도 축소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하는 데 더 나은 후보는 누구라고 보나.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더 낫다. 유색인종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그가 실제로 당선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오바마가 패하더라도 민주당은 11월 4일 선거에서 상원과 하원을 장악할 것이다. 80년대 이후 미국 경제를 지배해 온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정부 기능이 범죄 처벌 등에 한정돼야 하며 정부가 소득 재분배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자유지상주의는 적어도 한시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한국이 경제 강대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의 한계를 직시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일본과 한국이 선도한 경제 전략은 중국과 인도 등이 성공적으로 흉내 내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산업을 고도화해야 하며, 이를 위해 연구ㆍ교육ㆍ혁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수출 주도적 성장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 바란다. 수출 주도적 성장에는 물론 많은 이점이 있다. 그러나 홀로 설 수 있는 역량도 필요하다. 80년대 말 일본은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것으로 착각했다. 나는 일본의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다고 계속 지적했으나 일본인들은 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결국 장기불황에 빠졌다. 한국은 일본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다. 그러나 한국은 앞으로 일본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어떤 나라를 참조할 수 있나.

“내가 한국인이라면 스위스ㆍ핀란드ㆍ아일랜드를 잘 살펴보겠다. 이들은 친(親)시장적이면서도 불평등 해소를 위해 노력해 왔다. 스위스를 보라. 교육제도도 미국보다 훌륭하다. 노동자의 자녀들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나는 한국이 양적인 면에서 경제적으로 일류 국가가 되려고 너무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분배와 불평등 해소도 중요하다.”

-유럽의 강소국을 따라 하기엔 한국 인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키가 큰 환자나 작은 환자나 의사는 같은 처방을 내릴 것이다. 큰 나라건 작은 나라건 경제학자로서 내 진단은 같다.”

-한국에 가능한 경제성장률은.

“당분간 중국이 9~11%, 미국이 2.5~3% 성장한다고 전제했을 때 한국이 올바른 경제ㆍ교육ㆍ연구 정책을 편다면 5~6% 성장한다고 본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3.5%로 떨어지더라도 그것을 ‘세상이 망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는 말라.”

-한국 정부는 대체에너지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으려 하는데.

“환경운동의 성장과 중동에 대한 에너지 의존 문제 등을 배경으로 대체에너지 개발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에너지 산업은 고도의 과학기술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은 줄기세포 연구 등의 분야에서 선두 주자다. 그래서 나는 생명공학·생물학이 한국 경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위대한 야구선수도 항상 홈런만 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훌륭한 정책을 편 대통령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들 중에서 가장 중도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편 대통령은 누구인가? 바로 그가 가장 훌륭한 경

제 대통령이다.”

-중도파는 좌파 입장에선 우파고, 우파 입장에선 좌파다. 중도주의 경제학도 좌파라는 우파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데.

“그렇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 이론을 활용해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원했다. 그러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케인스를 공격할 때 말버릇처럼 “마르크스주의자인 케인스씨는…”이라며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수식어를 꼬박꼬박 붙였다. 물론 케인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는 중도파를 비난하지만 앞으로 5년 후 정도 되면 현 경제 위기도 중도파가 아닌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으로 빚어진 것이었다는 게 입증될 것이다.”

-어떤 지도자의 능력보다 제도가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지도자에 따라 경제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나.

“그렇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났거나 대공황을 20년은 족히 끌었을 것이다.”

-당신을 ‘20세기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나.

“나는 근대경제학을 수립한 주역 중 한 사람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는 누구인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세 번째로 위대한 경제학자는 누구인가.

“의미 없는 질문이다. 모든 과학은 그룹 활동이다. 우리는 실수하고 서로 실수를 고쳐 준다. 과학의 발전은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과학은 두 손 놓고 천재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귀하는 “경제에서 확실한 미래는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과학의 여왕’인 경제학은 미래를 잘 예측해야 하는 게 아닌가.

“모든 과학은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식의 양은 늘어나지만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경제학자들은 최선을 다한다. 내가 젊은 학생이었던 70년전보다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70년 후에도 우리가 10년 후를 예측하는 능력은 제한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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