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속 빈 현대의 배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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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 재산이 다 날아가도 좋으니 이런 회사는 망해야 합니다. "

지난 27일 현대증권 주주총회에 참석한 한 소액투자자는 이렇게 절규했다. 한국 제일의 그룹이라는 현대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한 마디로 투명치 못한 경영과 투자자를 우습게 여기는 행태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일갈이었다.

간판급 계열사들이 자금난에 봉착하면서 빚어진 이번 현대사태는 그룹측의 무책임 또는 오만이 빚은 '작품' 이며, 여기에 정부 당국도 일조했다.

이번 사태의 시발은 두달 전 이른바 '왕자의 난' 이었고,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 한달 전 현대투신 문제였지만 "그동안 현대가 취한 행보는 최소한도를 넘지 않았다" 는 게 증시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이달 초 현대투신은 정부의 압박에 밀려 비상장 계열사 주식의 담보제공을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방안을 내놓았다.

정부는 이것이 현실적인 최선의 안이라며 즉각 수용했다. 정부도 일조했다는 지적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현대도, 정부도 그게 최선의 대책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현대투신 대책이 본질적인 것이 못된다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대는 이같은 시장의 평가를 무시하고 정부가 수용한 만큼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이었다.

이후 기관이든 개인이든 투자자들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의 만기연장이 안된 것이 이것을 말해준다.

실력이 있어야 배짱도 부릴 수 있는 법인데, 이미 속이 비어버린 현대의 호기는 스스로를 망칠 뿐 아니라 전체 시장까지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헌 회장이 27일 밤 일본으로 돈을 구하러 급히 출국한 것이라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에 임할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현대의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의 김경림 행장은 취임 일성으로 "현대그룹의 편중여신을 줄여나가겠다" 고 말했지만 불과 며칠 만에 '편중 추가' 를 밝혀 완전히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현대문제에 대해 서강대의 한 교수는 "현대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자신들의 입지를 연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읽힌다" 고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심상복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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