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밀사 평양밀사] 7.94년 카터의 남북 잇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94년 6월 18일 정오 청와대 본관 2층 식당.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 부부와 오찬을 하고 있었다. 카터는 사흘 전 평양에 가 김일성(金日成)주석과 두차례 만나고 이날 서울에 와 청와대를 방문했던 것이다. 카터는 金주석의 구두메시지를 전했다.

"金주석은 각하께서 이전에 정상회담을 갖자고 한 제의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나에게 즉시 각하와 만날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金대통령은 주저없이 "좋습니다. 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라고 화답했다. 북한 핵무기 개발의혹으로 위기상황으로 치닫던 한반도가 대화국면으로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94년 6월초 한반도에는 전쟁위기감마저 감돌았다. 미국에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제한폭격론' 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등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사찰 이후 불거지기 시작한 핵무기 개발 의혹이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해소될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6월 16일 빌 클린턴 대통령 주재아래 열린 백악관 안보회의는 미군 1만명을 한국에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金대통령이 전하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

"미국이 동해에 항공모함을 갖다 놓고 이북을 폭격하겠다는 거예요. 제임스 레이니 주한(駐韓)미대사가 대사관 가족들을 철수시킨다는 보고도 올라와 있었어요. 당장 클린턴에게 전화해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안된다' 고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

카터 방북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5월말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채널을 통해 카터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카터가 이에 응했던 것. 한.미 양국은 '국제분쟁 해결사' 를 자청한 카터의 돌출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카터는 방북 하루 전인 6월 14일 서울에 들러 金대통령.이홍구(李洪九)통일부총리 등을 만났다.

金대통령은 카터에게 "북한을 흡수통일할 의사가 없다" "미국은 핵개발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金주석에게 전해달라" 고 했다. 속깊은 얘기는 카터-이홍구 밀담에서 오고갔다. 이날 저녁 신라호텔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눴던 이홍구 부총리(현 주미대사)가 공개하는 밀담내용.

"나는 남북이 이렇게 위험한 방향으로 막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했어요. 남북의 책임있는 당국자들이 만나 어떤 문제든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카터도 그 점을 명심했고 김일성(金日成)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예요. "

그의 발언은 정상회담을 주선해 달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사실 金대통령은 이미 93년 2월 취임사에서 "백두산이든 한라산이든 어디든 좋다" 며 정상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취임 한달 후 미전향장기수 이인모(李仁模)를 북한에 돌려보낸 것도 남북관계 정상화의 포석이었다.

북측은 5월 말에 강성산(姜成山)총리 명의로 정상회담을 포함한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특사 교환을 하자고 제의했다. 첫 실무접촉이 그해 10월에 시작됐는데 남북한은 특사교환 절차.팀스피리트 훈련 등을 둘러싸고 지리한 입씨름을 벌였다.

94년 3월 8차 접촉에서 논란끝에 급기야 북측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함으로써 남북관계는 되레 후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지 3개월만에 金주석이 카터를 통해 정상회담을 열자고 제의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金주석은 왜 이 시점에서 정상회담 카드를 꺼내든 것일까.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국제적인 제재를 차단하고 북.미 관계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따라다니던 남북관계의 진전을 충족시키려는 카드였다는 것이 통일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정상회담 첫 실무접촉은 6월 28일 오전 10시 판문점 '평화의 집' 에서 열렸다. 이홍구-김용순(金容淳)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을 수석대표로 한 회담에서 우리측은 북측의 진의부터 파악하려 했다.

구본태(具本泰)당시 통일원 통일정책실장의 말.

"나는 회담전 李부총리에게 '대표단회의에서 결론이 안나면 김용순에게 단독회담을 제의하라' 고 건의했어요. 단독회담에 응하면 정상회담을 할 의사가 있다고 본 거죠. 1시간 넘게 회담날짜.교환방문 등을 둘러싸고 팽팽히 맞서다 단독회담을 제의했더니 응하더라구요. 그래서 '할 의사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

2층 회담장으로 옮긴 이홍구-김용순은 폐쇄회로를 통해 金대통령과 金주석이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양측은 의견차를 좁혀가다가 10여시간만인 오후 8시25분 합의서 서명에 이르게 된다. 7월 25일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것이다. 분단 50년만에 이뤄질 두 정상의 첫 만남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동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