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찾아서] 10.군위 삼존석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우리나라에서 불교예술의 정수를 하나만 들라면 석굴암을 꼽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석굴암의 선행양식으로 주목받는 것이 바로 경북 군위에 있는 삼존석굴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대구 금호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면 이내 칠곡 톨게이트가 나온다.

여기서 5번도로를 타고 안동쪽으로 올라가면 908번 지방도로와 만난다.

한티고개를 넘어 군위쪽으로 '제2석굴암' 표지판을 보며 가다보면 길 왼쪽에 거대한 암벽이 나타난다.

이 곳이 바로 삼존석굴(국보 109호)이 있는 곳이다.

1962년 석굴의 존재가 처음 학계에 보고됐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지만 이젠 암벽 밑의 참배단에서만 볼 수 있도록 제한할 만큼 관광객의 발길이 잦다.

석굴은 깎아지른 화강암벽의 3분의 1쯤, 지상에서 6~7미터 정도의 높이에 자리잡고 있다.

동그랗게 파인 자연 암굴의 안쪽으로는 한 분의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이 모셔져있다.

가운데 좌정한 부처님은 웃음기 없는 엄숙한 얼굴에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4각대좌 위에 앉아있다.

한쪽 발에 힘을 빼고 허리를 살짝 비튼 이른바 삼곡(三曲)자세를 취한 좌우의 보살은, 보관이라든지 목걸이.옷자락의 새김 등이 더 세밀하지만 역시 고식(古式)이다.

왼쪽은 감로병을 들고 보관에는 화불이 있는 관세음보살, 오른쪽은 보관에 수병(水甁)을 새긴 대세지보살이다. 이들은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보살들이다.

따라서 본존이 석가여래의 대표적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고는 해도 아미타여래다.

이 셋을 합해 '아미타삼존(三尊)' 이라 한다. 부처가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항마촉지인이 한반도에서 쓰인 예는 이 석굴이 처음이다.

군위삼존석굴은 통일신라초기인 7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통설. 그러나 7세기 전반으로 올려잡는 학설도 있다.

어느쪽이든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경주 석굴암보다 1백년전후 앞선 것이므로 '제2석굴암' 이란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삼존석굴' 로 부르든지 차라리 '원조 석굴암' 이 나을 성도 싶다.

본디 석굴사원은 암산을 뚫고 동굴을 만들어 탑이나 불상 등을 안치한 곳. 중국에서는 4세기경 돈황석굴을 필두로 운강.용문 등에 수많은 석굴사원이 만들어졌다.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문물교류가 활발했고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시대인지라 이런 석굴사원을 이 땅에도 세우려는 열망은 대단했을 것이다.

대규모로 석굴을 만들려면 사암이나 석회암으로 된 큰 돌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어서 암벽을 뚫어 석굴사원을 만들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다.

그 대안이 다소 안쪽으로 들어간 암벽에 마애불을 새긴다거나, 군위석굴처럼 작은 자연굴에 밖에서 별도로 조각한 불상을 모시는 것이었다.

군위석굴만 해도 각각 2m안팎의 아미타삼존을 깎아지른 바위벼랑의 굴안에 안치하기 위해서는 같은 높이까지 흙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석굴사원을 향한 신라인의 열망을 짐작하게 한다.

그 열망이 결국 경주 석굴암이란 인공석굴의 조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박태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