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경쟁과 공존 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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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호 15면

시험지를 앞에 놓고 쩔쩔매거나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고 망연자실해하는 꿈을 한국인들은 자주 꾸는 편이다. 학생들은 물론 직장에서조차 인사 고과 등으로 끊임없이 점수를 매기는 한국 사회의 경쟁적인 분위기 탓이 아닌가도 싶다. 물론 무슨 일을 하든지 남을 이기고 싶어 하는 감정은 본능일 수도 있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도 또래와 놀이를 하는 순간부터 서로 더 좋은 장난감을 많이 갖고, 맛있는 음식을 더 먹으려고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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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본능적인 이기심을 다스리기 위해 인심도심(人心道心)을 가르치며 양보를 하도록 도덕 훈련을 시키기도 하고, 경쟁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점수화해 그 결과에 승복하는 페어플레이를 배우도록 할 수도 있다. 무작정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는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정당하게 노력하는 와중에 보다 세련된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것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밟고 최고 자리를 차지하는 싸움의 기술을 배워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조절하면서 약자와 강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워주는 데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목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경쟁의 와중에 깊은 상처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 예컨대 항상 최고만 지향하는 이들은 자칫 잘나가는 상황에만 익숙해져 작은 실패에도 크게 좌절하거나 분노할 수가 있다.

이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소위 잘나가는 어른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경우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 반대로 항상 패자의 역할만 경험하는 아이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레 겁을 먹고 모든 일을 회피하거나 포기하는 우울증적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이상적인 환경이라면 패자나 승자 모두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도록 개개인의 숨어 있는 개성을 인정하고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같이 노력할 것이다. 학교의 예를 들자면 공부는 못해도 청소는 잘하는 아이에겐 청소 점수를 높이 주어 사회에 나가 청소회사를 차리도록 준비해 준다든가, 화초를 잘 키우고 짐승을 잘 돌보는 데 관심이 있다면 거기에 맞춰 인생을 설계하게 해서 탄탄한 화훼단지의 주인이나 동물 조련사로 키워줄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은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는 것에만 목표를 두어 일부 인기 학과와 대학의 경쟁력만 치열해지고, 나머지 학생은 들러리가 되어 학교를 다니는 흉내만 내는 형상이다. 학벌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른바 일류 대학에 가지 못한 이들은 평생 공부에 대한 한을 품고 살기도 하고, 자녀들을 그런 대학에 보내지 못하면 남들에게 체면이 손상될까 봐 걱정한다. 부모 등쌀에 억지춘향 격으로 사는 아이들은 당연히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무감동·무의욕에 빠져 청년백수가 되는 아이도 많다. 부모가 좋아하는 점수 따는 준비(고시, 공무원 시험, 자격증 등)나 하며 젊음을 탕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가정과 학교의 잘못된 교육방식을 분석해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자면 모든 것을 점수로 줄을 세워 일등만 오로지 존재가치가 있다며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논리를 당연히 생각하는 병든 사회에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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