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밀사 평양밀사] 5.박철언의 '북한 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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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89년 7월 1일 평양 5.1경기장. 당시 임수경(林秀卿)전대협 대표가 참가해 서울에 충격을 준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에는 뜻밖의 남측 손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박철언(朴哲彦)대통령 정책보좌관.강재섭(姜在涉)민정당 국회의원 등 대북 밀사 3명이었다. 이들은 북측 청년들이 임수경을 열렬히 환영하는 광경을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박철언 일행이 허담(許錟)노동당 대남비서.한시해(韓時海)당 부부장 등을 만나기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판문점을 거쳐 평양을 방문한 것은 6월 30일. 이 밀행은 당시 박찬종(朴燦鍾).이철(李哲) 두 야당의원에 의해 폭로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역시 전두환(全斗煥)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정상회담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盧대통령은 집권 첫 해인 88년 6공의 통일정책 기조를 담은 '7.7선언' 을 발표하면서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겠다" 고 밝혔다. 남북관계를 화해기조로 바꾸겠다는 이 선언은 정상회담을 겨냥한 것이었다.

7.7선언은 또 굳게 닫힌 북한의 문을 열기 위해 소련.중국.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개선도 고려한 다목적 카드이기도 했다.

盧대통령은 이어 8.15 경축사에서 정상회담에 관한 운을 떼었고 그해 10월 유엔총회 본회의 연설을 통해 전세계를 무대로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盧대통령의 정상회담에 대한 집착은 90년 9월 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연형묵(延亨默)총리에게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盧대통령의 증언.

"나는 연형묵에게 이렇게 당부했어요. '남북이 협력해 우리 민족에 큰 희망을 안긴다면 김일성(金日成)주석은 6.25를 일으킨 죄를 벗고 큰 일을 하는 겁니다.

앞으로 金주석이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정상회담은 金주석을 위해 백번 좋은 일이니 내 뜻을 그대로 전해달라' 고 했지요. "

북측은 이 무렵 소련.동유럽 국가들이 체제개혁으로 몸살을 앓는 것을 목격한 데다 이들 나라가 한국과 국교수립에 나서자 위기감을 느꼈다.

기존 동맹관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흐름 속에서 11월에는 베를린 장벽까지 무너지자 북측은 대남카드를 적극 뽑아들었다.

카드는 다름아니라 정상회담 가능성을 넌지시 비추는 것이었다.

5공시절 남북 접촉점이었던 박철언-한시해 라인이 비밀 창구로 재활용됐다. 6공의 '떠오르는 황태자' 로 불리던 박철언은 청와대 정책보좌관실에 별도 팀(정책연구2반)을 구성하는 한편 안기부장 특보시절 손발을 맞췄던 안기부 별동대를 비밀리에 가동시켰다.

별동대의 핵심은 강재섭 의원(현 한나라당)이었다. 박철언은 '朴신저' 란 별명답게 숱하게 휴전선을 넘나들며 북측 인사들과 접촉했다.

그의 증언.

"저는 85년부터 91년까지 총 42차례에 걸쳐 金주석을 비롯한 북측의 주요 인사들과 만났습니다. 당시 아무런 신분보장 없이 21차례나 북측지역에 비밀출장을 다녔는데 그때의 긴박감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

박철언이 '삼팔선의 봄' 을 애창곡으로 삼은 것도 이런 행적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북측 권력 핵심들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단지 북측 파트너 한시해가 88올림픽 기간 중 서울을 방문했다는 설만 무성하다.

평양 잠행시 그와 동행하곤 했던 강재섭 의원도 취재진에게 "국가 기밀과 관련된 사항이므로 지금으로선 뭐라 말할 수 없다" 며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밀사들의 활동을 엿볼 수는 있다. 중단된 국회회담.적십자회담.체육회담 등이 7.7선언 이후 재개되고 90년 9월부터 남북 총리간 고위 당국자회담이 시작된 것에서 양측 밀사들이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만들어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철언의 밀사활동은 당시 청와대.안기부.통일부 등 관계자들의 불만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김용갑(金容甲)총무처장관(현 한나라당 의원)이 전하는 당시 청와대 분위기.

"청와대 수석들이 저에게 볼멘 소리를 하더라고요. 정상회담 추진은 관계기관이 맡아서 해야 하는데 청와대가 직접 나선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예요. 또 정상회담만 열면 만사가 해결될 듯이 생각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데요. "

특히 안기부의 불만이 컸다. 안기부의 한 간부에 따르면 박철언이 북의 속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철언의 밀사 역할도 그의 정치적 실각과 함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90년 2월 3당합당 이후 그는 YS(金泳三)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태를 보이다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남으로써 정상회담 추진의 바통을 서동권(徐東權)안기부장에게 넘기게 된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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