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방부·언론 노근리학살에 무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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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둘러싸고 미국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핵심은 두가지다.

하나는 미군이 정말 민간인을 대량 살해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성 여부, 상관의 명령 유무, 살해규모에 대한 것이다.

최근 미국 언론에서 불붙고 있는 '증언의 신빙성 논란' 은 주로 데일리 상병(당시 계급)과 플린트 일병에 관한 것이다.

데일리는 AP를 포함한 다수 언론에 "상관의 명령을 받고 다리밑 피난민들에게 기관총을 쐈다" 고 증언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살해에 의도성이 있었던 것이다.

플린트 일병은 살해를 목격했으며 역시 상관의 명령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 (민간 잡지)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같은 언론은 데일리가 현장의 부대에 소속되지 않았으며 플린트는 사건 하루 전 후송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보도들 중 어떤 것은 "핵심 증인들이 신뢰성이 없으므로 학살 자체도 믿기 어렵다" 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다른 언론들은 노근리 사건이 미군이 경황이 없었던 전쟁 초기에 일어나 관련 기록이 매우 부실하며 있는 기록들도 서로 상충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증인의 신빙성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워싱턴포스트는 "참전군인들에 따르면 다른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제7 기갑연대도 극도의 혼란 속에서 퇴각했기 때문에 기록유지가 부실했다.

게다가 1973년 화재로 인력기록의 80%가 없어졌다" 고 보도했다.

플린트 일병에 관해서도 그가 사건 전날이 아니라 사건 당일 후송됐으므로 현장을 보았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새로운 기록 문건도 등장했다.

이런 '증거의 혼란' 은 그러나 사건 자체의 큰 윤곽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미 국방부와 언론의 분위기다.

사건과 관련된 다른 증언이 많기 때문에 일부 증언의 진실성이 문제가 돼도 '살해' 라는 사실의 파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미군 당국이 최근 한국측 진상조사반에 넘긴 면담청취록은 80여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이들은 노근리 사건현장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이 30여명, 현장은 아니지만 사단본부 등 근접지역에 있었던 사람이 40여명, 한국전쟁의 전반적 상황을 알고 있는 참전 군인 10여명이다.

미국측 조사반은 이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증언과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관련 기록을 검토한 결과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인 민간인 살해가 있었다" 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동기부분이다.

전쟁상황에서 흔히 있는 오폭(誤爆)같은 우발적 사고였는지 아니면 병사들이 상관으로부터 구체적인 살해명령을 받았거나 병사들이 "살해명령이 있는 것" 으로 인식했던 것인지를 가려내는 데 미국측은 조사를 집중하고 있다.

이 결과에 따라 피해자 명예회복이나 배상의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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