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있는 책읽기]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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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부터의 탈퇴
권혁범 지음
삼인, 269쪽, 9500원

“‘나라’없이 살아본 뼈아픈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국가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총독부 명령체제와 개발독재적 분단체제의 연속선상에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우리 가슴 속에 최고의 권위이자 ‘마법의 해결사’로 각인되어 왔다.”- 권혁범의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적이 불온하고 선정적인 제목이다.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국가가 무슨 동호회도 아니고 임의로 탈퇴하겠다니. 하지만 이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그것이 단지 한번 해본 빈 말이 아니라 진지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명분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는 국민이나 국가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가능했으나 그 국민과 국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일종의 금기였다. 아마도 국민이나 국가가 너무나 자명한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도 안에서 불가능했던 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한국 최초로 두 체급을 석권한 권투선수 홍수환이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승리한 뒤 전화기에 쏟아낸 말이다. 수화기 저편 어머니의 말씀.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이 짧은 대화, 일종의 동문서답에서 국가주의의 혐의를 발견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한국의 일상적인 문화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국가, 혹은 국가주의의 흔적이다. 이 흔적에 대한 탐구는 결국 그 언어들, 우리가 사용하는 관용어들이 마름질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묻는 것이다. 혹은 문화 그 자체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언제나 현상은 본질을 감추는 법. 만일 현상이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모든 과학은 쓸모없게 될 것이라고 누군가 일갈하지 않았던가. 깊숙이, 우리 안에는 이미 깊숙이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을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적 아이디어가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전염돼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2002년. 월드컵이 열렸다. 월드컵 이전에 이미 약속된 것이긴 했지만, 16강을 훌쩍 넘어 4강에 오른 후에 대표선수들은 병역면제 혜택을 받는다. 대한민국에서 병역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 한명을 두번이나 낙선시켰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4강신화를 이룬 축구선수들에게만큼은 관대했다. 물론 여기에 이견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의견은 대다수의 찬성 의견에 묻히고 만다. 그 이유는 ‘국위선양’. 그게 진짜 국위선양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의심스럽게 보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아직도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는 가수 유승준에 대한 전국민적 폭력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유승준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축구선수와 유승준에 대한 차별대우는 좀 심했다 싶다. 국가에 대한 신뢰, 혹은 국가의 권위는 지금도 여전한 셈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것의 지나침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제국주의 국가의 국가주의와 약소국의 국가주의를 동일시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미국을 보자. 지금 이라크에서는 미국의 ‘국익’이라는 깃발 아래 살인행위가 합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신기하게도 ‘국익’이라는 명분은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만들어버린다.

의심은 이어진다. 제국주의 국가의 욕망과 ‘지금-여기’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욕망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억압은 한국의 문화가 제국주의의 그것과 이미 많이 닮아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는지. 거미줄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사마귀가 거미줄의 바깥을 보지 못하듯, 국민국가와 국가주의의 문화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권혁범이 『국민으로부터의 탈퇴』에서 개인주의를 찬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일권 (초암논술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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