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피바람' 발언의 잘못된 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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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당 김영배(金令培)상임고문이 "정권 재창출이 안되면 피바람이 불 것" 이라는 섬뜩한 발언을 해 정계가 한동안 아연해마지 않았다.

발언한 당사자도 본의가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사과하고 한때 망언의 규명을 요구하던 한나라당도 평소 金고문의 발언이 세련되지 못한 점을 감안해 돌출성 발언으로 접어넣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발언이 나온 발상과 집권세력 내부의 공감 정도다.

金고문의 발언은 정권교체가 되면 피의 보복 같은 게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지금까지 민주적 정권교체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그것을 당의 목표로 삼아 투쟁해 왔었던 정치인으로서 할 소리가 아니다.

자기네들의 정권교체 요구는 옳고, 남이 하면 나쁘다는 말인가. 이것은 최근에 나온 김성재(金聖在)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소수 정의론(正義論)' 과 흡사한 논리를 담고 있다.

이런 논리를 뒤집어보면 정치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권교체를 막아야 하며 그것이 정의라는 식의 발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또 과거처럼 온갖 음모와 권력의 왜곡된 사용 등 무리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참으로 걱정스러운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金고문이 발언한 곳은 집권당의 핵심 세력인 동교동계 조직인 인동회(忍冬會)의 총선 뒤풀이 모임이었다.

비록 이번 발언은 밖으로 새어나오는 바람에 당사자가 사과하고 수습하는 쪽으로 흘러갔지만 행여 집권세력 내부에서는 그같은 발상과 발언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피해의식과 잘못된 논리들을 권력 핵심부가 공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이런 발언들에 대해 언행을 삼가라는 주의를 주는 데 그치고 있는 것도 그런 의구심을 증폭하는 요인들이다.

실제로 각당으로서는 차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금부터 다음 대선을 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한 집권당으로서는 다음 정권의 창출에 더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민주적인 절차와 국민의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권 재창출이 안되면 엄청난 보복이 동반되는 양 몰아가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자기네 내부단결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정말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이 정권이 집권 초기에 보복의 정치를 했기 때문인지 왜 그렇게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김대중(金大中)정부도 이제는 소수정부의 피해의식을 불식하고 보다 넓게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정치를 끌어내야 한다. 정치를 보다 밝고 상식적으로 보는 건전한 눈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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