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고지 선점한 DJ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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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다른 국가라면 레임덕으로 불릴 상황이다.

지난 총선은 민주당을 소수로 전락시켰다. JP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의석수를 불린 DJ에 대한 배신감에서 공조복원을 거부한 상태다.

게다가 결별은 단순한 감정 탓만은 아니다. 자민련 내부는 DJP 연대를 논할 분위기가 아니다. 사무총장마저 공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충청권 민심이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때 자민련이 DJP 연대를 재건하고 민주당이 인위적 정계개편에 시동을 건다면 그 수혜자는 오히려 한나라당일 가능성이 크다.

자민련 내에서 정계개편에 반대하거나 내심 차기 대권주자에 줄을 댈 기회만 엿보는 관망파 중 일부가 DJP 공조보다 한나라당 행(行)을 더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명만 반기를 들면 한나라당은 과반 의석을 달성한다.

DJ가 '상생의 정치' 를 펼친다는 큰 자세에서 인위적 정계개편을 포기한 지난번 영수회담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다.

그러나 DJ를 레임덕으로 볼 수는 없다. 정치는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진정한 '힘' 으로 전환하려면 '아이디어' 가 있어야 한다.

재기 단계에 들어선 한국경제를 한층 더 강화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민족화해를 촉진시킬 정책이 있어야 정치를 이끌어나갈 힘을 다수 의석에서 끌어낼 수 있다.

게다가 그 아이디어는 정부여당이 내놓는 처방과 달라야 한다. 그래야 수권정당으로서의 위상을 구축할 수 있다.

총선 이전에는 이회창 총재가 이처럼 정책으로 평가받지 않았다. 심지어 방탄국회로 여권에 맞서고 식물국회로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상당수 국민은 한나라당만을 탓하진 않았다.

오히려 야당은 약자로서 동정심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다 여권이 실책을 범하면 가만히 앉아서 그 반사이득을 보았다. 여권이 과반의석 위에서 야당을 침묵시키고 독주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였고 DJ가 대화정치를 천명했다. 이회창 총재가 정책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국면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위해 다수 의석을 동원할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다. 주어진 상황에 비춰볼 때 경제든 안보든 민주당이 상당한 명분을 지닌 정책을 이미 선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이 처한 긴박한 상황은 많은 대안을 허락하지 않는다.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개혁에 더 한층 박차를 가해야 한다. 기아선상에서 핵장난을 서슴지 않는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려면 강경한 서해교전식 국방정책에 온건한 햇볕정책을 가미할 수밖에 없다.

누가 대권을 장악하든 큰 정책기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여당일 때 그 수장 역시 개혁의 기치 아래 노개위(勞改委)를 출범시켰고 금개위(金改委)를 조직했다.

게다가 '동해 잠수정' 사건에는 강경한 군사작전으로 대응했고 북한 기아사태엔 쌀 원조를 결행했다.

역사에 남을 치적을 세운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면 DJ는 국민적 컨센서스에 가까운 정책노선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곁에는 전문성 및 경험 위에서 컨센서스를 구체적 정책으로 발전시켜 온 관(官)이 버티고 서 있다.

국민적 컨센서스에 부응하면서 DJ식 노선과는 다른 처방책을 내놓아야 하는 이회창 총재로선 고민스러운 상황이다.

'상생의 정치' 만큼 야당에 힘든 게임은 없다. 경제나 안보나 여러가지 다양한 정책대안을 허락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회창 총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전문성을 갖춘 관이 아니라 투쟁에 더 익숙하고 운동에 더 능한 정당이다.

대화정치가 힘겨운 것은 DJ가 아니라 이회창 총재다. 이회창 총재의 어깨에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이 달렸다.

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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