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총선체험] 선관위 활동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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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그날 한 후보가 지역주민 20여명에게 식사를 제공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식당 맞은편 건물 3층에서 출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색해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안을 빼꼼이 들여다 보면서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들어가는 사람, 삼삼오오 떼지어 상호를 확인하고 들어가는 사람….

뭔가 목적이 의심스러운 모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긴장 속에 후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한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식당안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계모임을 위장한 향응제공 현장이라고 판단하고 식당안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식당은 아수라장이 됐다. 온갖 욕설과 항의가 빗발쳤다. "죄없는 시민들을 공무원들이 이렇게 해도 되느냐.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

그 와중에 참석자중 한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당신 밥 한끼 사주고 왜 우리를 이렇게 난처하게 만드느냐. 빨리 와서 해명하라" 고 하는 것이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식사대금을 내려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정당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상대로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예상대로 "선거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한 계모임" 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반박 자료와 정황을 제시하면 "제보자를 밝히면 모든걸 밝히겠다" 고 억지를 부리거나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날 식사현장에 있었던 20여명을 대상으로 7일동안 끈질기게 조사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모른다" "선거때는 다 그런 것 아니냐" "척 하

면 알아야지" 라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후보자까지 직접 개입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결국 확실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이 사건을 일단락 지어야만 했다. "이것이 한계로구나" 라는 체념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생각해보았다. 어째서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견고한 벽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은 모양이 없어 보이지도 않고 부수려고 해도 잘 부숴지지 않는 벽이다. 나쁜 후보들은 그 벽을 사이에 두고 어떤 불법도 두려움없이 감행한다. 오늘은 선거일. 투표로 이 벽을 허물었으면 좋겠다.

권기천 <대구 수성구 선관위 지도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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