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노조-상급단체 이해 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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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노조의 기여도나 비중을 생각할 때 제명까지 하는 것은 부담이 컸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하는 등 노동운동의 기본정신인 '연대'를 깨뜨리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연맹이 현대중공업 노조를 제명한 배경에 대해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란 얘기다.

민주노총의 이번 결정은 노동계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노동운동 상급단체와 개별노조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빚어진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선 앞으로 상급단체가 하부 노조를 기강 확립 차원에서 징계하는 사례가 더욱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노동운동의 중심이 산별로 전환하는 만큼 개별노조의 이기주의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예컨대 보건의료노조도 산별 합의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계속한 서울대 병원 노조 지부장에 대한 징계를 추진 중이다. 특히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보호, 주5일제 근무 등 노동 현안과 관련해 목소리를 한층 높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 왜 제명했나=지난 2월 현대중공업 하청근로자 박일수씨의 분신 자살을 둘러싼 현중노조와 금속연맹의 갈등이 발단이 됐다. 당시 금속연맹은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근거로 박씨를 열사로 규정하고 비정규직 차별철폐 투쟁의 도화선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현중 노조는 분신자살 직후 만들어진 노동계의 비상대책위를 탈퇴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내부적으로 충분히 풀어갈 수 있는 문제가 지역 노동단체 등이 개입하면서 더욱 복잡하게 꼬였다는 것이다. 현중 노조는 분신 대책위와 하청노조 측 간부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고 금속연맹과의 갈등은 갈수록 증폭됐다.

현대중공업 하청노조는 "현중 노조원들이 조문을 핑계로 박일수씨 영안실에 몰려와 대책위와 하청노조 간부들에게 폭언을 하고 심지어 3월 3일에는 대책위 농성 천막을 훼손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금속연맹은 3월 26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현중 노조에 대한 제명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노동계에선 분신사건 이전에 현중 노조와 연맹의 갈등이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현중 노조는 민주노총의 출범을 주도한 1등공신이지만 몇년 전부터 민주노총 활동이 뜸했다는 것이다. 실제 현중 노조는 지난 7월 10년째 무분규를 기념해 잔치를 벌일 정도로 이젠 강성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조합원이 과거 집행부의 과격투쟁에 등을 돌렸고, 집행부도 시대적 변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실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평균 연령이 40대 후반인 현중 정규직 노조원들의 최대 관심은 임금과 고용 안정"이라며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 등 노동계 전체의 현안에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

◆ 한국노총 가입 가능성도=현중 노조는 매년 7억원의 연맹비를 내는 금속연맹의 가장 '큰손'이다. 전체 연맹비 수입이 연 50억원인 연맹 입장에서는 재정이 흔들리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결단을 내린 셈이다. 현중 노조가 재심을 청구할 경우 연말 대의원대회에서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현중 노조의 현 집행부가 바뀌기 전에는 제명 결정이 번복되기는 힘들 전망이다.

현중 노조가 끝내 제명당할 경우 독자노선을 걸을 수도 있고, 한국노총에 가입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노총에선 현중 노조가 가입한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중 노조 관계자는 "예전부터 우리 노조가 한국노총에 가입한다는 설이 돌고 있으나 내부에서 전혀 논의된 바 없다"고 일축했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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