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7월 YS·김일성 회담 왜 깨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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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994년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주석간에 합의됐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계획은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성사 일보 직전에 무산됐다.

94년 6월 북한 핵(核)문제로 한반도가 위기상황으로 치닫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카터는 청와대를 방문, YS에게 "김일성 주석이 언제 어디서든 정상회담에 호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 전했다.

YS는 카터가 평양에서 들고 온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즉석에서 수락했다.

이에 따라 당시 이홍구(李洪九)통일원장관과 김용순(金容淳)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은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가졌다.

13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양측은 정상회담을 94년 7월 25~27일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그후 두차례 실무접촉(7월 1, 2일), 통신 실무접촉(7월 7일), 경호 실무접촉(7월 8일)을 통해 세부 일정과 절차에 합의했다.

또 7월 9일 남측은 평양 실무접촉(7월 13~16일) 참가명단을 북측에 전달했고, 북측도 강성산(姜成山)정무원 총리 명의로 된 신변안전보장 각서를 남측에 보내왔다.

"金주석은 정상회담 의사를 밝힌 뒤 6월 20일~7월 5일까지 조국통일과 관련한 수십차례의 교시와 10여건의 친필교시를 내렸다" 고 98년 4월 13일 평양방송은 전했다.

그가 정상회담 준비에 매달려 왔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은 성사를 불과 17일 앞두고 무산됐다. 김일성이 7월 8일 묘향산 특각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북측은 7월 11일 김용순 위원장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통해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 최고위급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하여 통지한다" 고 전해왔다.

정상회담 무산통고를 받은 YS는 "아쉽게 생각한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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