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신용불량 후보' 기사 돋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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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승옥은 1964년 '사상계' 에 발표한 '무진기행' 에서 문학 묘사의 절정을 실현해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이 답답해지는 안타까운 경험을 하게 했다.

그는 "안개는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불어 내놓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 가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싸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현재 총선을 앞두고 헤쳐버릴 수 없는 밤길 안개 속에 서 있다.

더듬거리면서 해가 뜨거나 바람이 불어 정당.후보자들을 싸고 있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중앙일보는 3월 15일자부터 며칠 동안 분야별로 각 당의 총선 공약을 요약, 보도해 우리 앞의 안개를 약간은 걷어주었다.

이들 정책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평가까지 담은 전문기자들의 성의 있는 기사들은 의미가 있었다.

그 후 안개를 걷어주는 바람과 해의 역할을 한 것은 선거관리위원회와 언론, 그리고 주요 기관들의 사이버 공간이었다.

지난 한달 동안 후보의 재산.납세.병역사항 등을 공개했고, 4월 8일자에는 후보들의 전과까지 공개했다.

이것은 다른 기관에서 생산한 정보를 나름대로의 편집방침에 따라 가공하고 유통시켜 안개를 걷어주려는 노력이었다.

중앙일보 자체의 아이디어에 따라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 안개를 걷어주는 역할을 한 기사로는 4월 6일자 1면 머릿기사와 2, 3면에 걸쳐 1백41명의 신용불량 후보를 찾아내 보도한 것을 들 수 있다.

기획취재팀이 신용정보제공회사의 온라인망을 이용, 후보들의 신용상태를 점검한 결과 나온 기사다.

우리 사회가 신용사회로 진입한 지 불과 몇 해 되지는 않았으나 신용불량자가 중요한 공인(公人)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전제 아래 후보자를 거르는 새로운 수단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이 기획은 시의적절하고 타당한 것이었다.

후보자 중에서 재력있는 신용불량자, 재주 좋은 무재산 대출자들을 골라내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신용불량 기록 보유자.주의거래자.황색거래자.적색거래자.금융부실거래자 등을 가려내고도 A씨, B씨 등 가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단지 신용불량자가 있다는 점을 지적만하고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자세로 보인다.

이러한 기사 취급 방식은 자기가 생산한 훌륭한 기사의 활용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신용정보이용보호법에 의해 금융거래내용과 실명을 적시하지 못하게 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실명 보도 후 오류가 있을 경우 엄청난 소송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을 염려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17대 총선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던져주기에는 발상과

노력이 너무 아깝다.

게다가 이 기사와 관련한 어떤 후속기사도 없어 다음 총선에서 신용정보공개 사안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장조차 생략하고 있다.

한 달 이상 지면의 큰 부분을 차지해온 선거 관련기사는 유권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스모그를 걷어주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독자들은 그 기사들을 통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한번 더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

신문을 모아놓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쉽게 잊는 게 보통사람들이다.

정성스러운 독자라면 디지털 신문을 통해 찾아보기도 하겠지만 좀 더 친절하게 별도 특집면을 만들어 후보를 검증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정리해 준다면 애프터서비스가 되고, 신문의 영향력을 제고할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옥이 '무진기행' 에서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꼭 한 번만" 이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도 이번 선거까지만 '공인의 신용에 관한 이 사회의 무책임' 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

손명세 <연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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