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기획] 후보 신용도 검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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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논.밭 20만평 등 1백억원 이상 재산을 신고한 한 '땅부자' 후보의 신용 등급은 '적색(赤色)' 이다.

5년 전 한 지방은행에서 빌린 4천여만원을 갚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원칙적으로 은행에서 돈 한푼 빌릴 수 없다. 금융기관에서 '적색 거래자' 로 분류되는 것은 요즘같은 신용사회에선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총선 출마자들의 신용도가 본사 취재결과 드러났다.

본사 기획취재팀은 병역과 납세실적 검증에 이어 총선 출마 후보 1천40명에 대해 신용도 검증작업을 벌였다.

병역이나 납세같은 국민 의무 못지 않게 금융기관과의 신용을 지키는 것도 신용사회의 주요 덕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금융기관이 매기는 신용 등급은 개개인의 신용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디지털' 식 지표다.

조사결과 드러난 총선 후보들의 신용도는 실망스러웠다.

후보 10명 중 1명 이상 꼴로 '신용 불량자' 낙인이 찍혀 있었다. 수십억원대의 재산가면서도 몇푼 안되는 채무를 갚지 않는 얌체 후보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재산.납세 실적이 미미했던 386세대 후보 일부도 신용도 불량으로 금융거래에 제약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후보는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전무했다. 몇몇 후보는 10만원 미만의 이동통신 사용료를 납부하지 않아 신용 불량자군에 속했다. 지방세를 내지 않아 신용 불량자가 된 경우도 있다. 지난 3월 정부가 1천만원 미만 소액 대출자들에게 신용 사면을 했지만 본사가 찾아낸 신용 불량 후보들은 대부분 1천만원 이상의 대출자라 혜택을 받지 못했다.

◇ 재력가 신용 불량자들〓수도권의 한 여당 후보는 재산 10억여원을 신고했다. 그러나 4개 은행에서 나눠 빌린 4천만원의 빚을 갚지 않았다. 연체가 계속돼 은행마저 대출금 회수를 포기했고, '금융 부실 거래자' 란 최악의 신용 판정이 내려져 있다. 이 후보에겐 대출은 물론 신용카드 발급도 허용되지 않는다.

영남권 여당 후보 A씨도 이런 범주에 들어있다. 10억원이 넘는 재력가지만 2년 전 은행에서 꾼 3천만원을 갚지 않고 있어 '적색 거래자' 판정을 받았다. 신고 재산액이 2억원대인 영남권의 한 야당 후보는 3년 전에 빌린 83만원이 연체돼 있어 금융 부실 거래자로 분류돼 있다.

반면 10억원대 이상의 재산을 신고해 '재력가' 소리를 들었던 후보 중에는 재산규모보다 훨씬 많은 금융기관 빚이 있는 이들도 있다. 수도권의 한 여당 후보는 10억여원의 재산을 신고했지만 금융기관 대출금은 재산의 6배가 넘는 60억원이었다.

◇ 재주좋은 무재산 대출자들〓자기 재산은 미미한데도 금융기관에서 거액의 돈을 얻어쓰고 있는 후보도 많았다. 담보는 없어도 연대보증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대출금을 제때 상환하지 못해 신용 불량 상태에 처해 있다. 이같은 신용 불량은 곧바로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실 대출 의혹까지 제기된다.

수도권의 야당 후보 B씨의 신고재산은 2천만원 미만. 그러나 B씨는 11억여원을 금융기관에서 빌렸다. 자기 재산의 60배가 넘는 돈을 대출받은 것. 재산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영남지역 야당 후보 C씨의 재산 신고액은 0원. 재산 한푼 없는 그는 10여개 은행에서 10여차례에 걸쳐 1억1천만원을 대출받았다. 그 역시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한 '금융 부실자' 다.

◇ 현역 의원〓8명이 금융거래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한나라당 4명, 민주당 3명, 자민련 1명이었다.

10억원대의 재산을 신고한 야당 의원은 금융기관 빚이 11억여원에 달했고, 5억원대의 재산을 신고한 또다른 야당 의원도 대출금이 재산보다 많았다. 이중엔 사업체의 경영난으로 은행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2천여만원의 대출금 때문에 황색 거래자 판정을 받은 변호사 출신 의원도 있었다.

기획취재팀〓이상렬.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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