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코드 2000] 5.도심속의 섬 인사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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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 인사동에 간다. 햇살이 환장하게 밝든지 비가 눈물처럼 주룩주룩 내리는 날 우리는 인사동에 간다.

인사동은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도심의 섬이다. 이리저리 바쁜 첨단의 일상에 놓쳐버려 외따로 동그마니 뜬 우리의 마음 자리다.

인사동은 한국 문화의 단층(斷層)이다.

6백년전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며 초석으로 놓인 한국인의 원형질에 시대를 거듭해온 삶과 정이 켜켜이 쌓여 있다.

고래등 같은 양반집부터 모래틈만 한 머슴 집, 개량한옥에서 블록.타일 집, 빌딩까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부터 거덜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부터 못 배운 사람 모두가 각기 고유의 무늬를 띠고 인사동을 넘나든다.

반만년 그 이상 아득한 연대의 한국이 층층이 쌓인 통시적 공간이면서 인사동은 지금도 그 단층 모두를 살아내는 공시적 공간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사과 맛 버찌 맛/온갖 야리꾸리한 맛, 무쓰 스프레이 웰라폼 향기 흩날리는 거리/웬디스의 소녀들, 부띠크의 여인들, 까페 상류사회의 문을 나서는/구찌 핸드백을 든 다찌들 오예,"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중)

1991년 젊은 시인은 이렇게 90년대의 욕망.소비.불임의 문화를 예감했다.

압구정동 또한 일상에서는 따로 가야하는 '섬' 이면서도 인사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곳 다 탈일상의 공간입니다. 인사동은 전통을 함께 향유하는 공간이고 압구정동은 첨단을 소비하는 공간이지요. 동네 자체가 90년대 압구정동은 욕망의 기호고, 인사동은 문화의 기호입니다."

급조된 욕망의 기호 내지 패션 공간은 더 첨단의 소비를 향해 날아가버렸다.

그래서 유하씨는 이제 압구정동의 기호는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사동은 오늘도 한국 문화의 기호.상징으로서 여전히 살아 있다.

'바람 부는 섬' '우리 그리운 날은' '오, 자네 왔는가?' '갯마을 밀밭집' '툇마루' 등 인사동은 상호들부터 나름대로 의미를 담는다. 꾸미되 다른 것을 밀치지 않고 마치 생활 한복처럼 친근하다.

안국동 네거리부터 종로2가 네거리로 빠지는 인사동 중심로 6백90m에는 화랑.표구점.고서점.골동품점.지필묵방.공예품점.전통 찻집과 주점 등이 크고 작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나름대로 자리하고 있다.

중심로는 다시 좌우로, 혹은 뒷길로 이어지며 끊기며 수십 수백 개의 골목을 실핏줄처럼 간직하고 있다.

산비알 다랑이 같은 그 골목엔 올망졸망한 상점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인사동 문화는 이런 골목들에서 나온다. 오래된 전통 한옥도 그러려니와 거기에 잇대어 크고 작게 지은 집들을 이리저리 도는 골목의 생김새 자체에서 한국문화의 원형이 나온다.

사통팔달 확 뚫린 길은 오가는 목적.기능만을 위한 확실한 길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감출 것은 감추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는 골목은 너와 나의 만남의 길이다.

그 길은 기능과 경제가 아니라 사람의 예의와 정을 잇는 길이다.

"골목은 오가는 것 못지않게 사람의 어울림이 자연스레 이뤄집니다. 인사동 골목은 전통의 계승과 재현에 관련된 활동을 온존(溫存)하기에 적합한 공간입니다."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그 골목을 즐겨 찾았던 문화.예술인들의 이름을 따 골목 이름도 짓자고 김교수는 제안한다.

인사동은 내로라 하는 문화예술인들만 찾는 게 아니다. 남녀노소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찾아 곧바로 문화인이 되는 공간이 인사동이다.

연필 한 자루, 부채 한 자루, 수첩 한 권을 사도 딴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면 곧바로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인사동을 있게 한다.

인사동 상점의 주인들도 각별한 문화인들이다.

화랑이든 찻집이든 예술가나 애호가들이 이문보다는 그 문화를 기필코 지켜내기 위해 상점을 차리고 손님들에게 한 수 가르치기도 한다.

"주인과 손님,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한자리에 어울려 문학은 무엇이고 그림은 어떻다는 등등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인사동 집집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화가.문인.사진 작가.아마추어.일반인 등 경지나 장르를 넘나들며 문화를 생활화하는 인사동이 좋습니다."

30여년째 인사동 골목에 사무실을 내고 있는 '현대시학' 주간 정진규 시인의 말이다.

인사동은 한국문화의 지층이나 박물관이 아니다.

전통과 오늘, 문화인과 일반인 등 개념상으로는 상반된 것들이 어우러지며 한국문화의 내일을 열어 가는 곳이다. 인사동에도 오락실.비디오 방들이 있다.

외국인들이 민속공예품점 앞에서 액세서리 좌판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 모습도 인사동에서는 모나지 않다. 인사동은 나와 다르거나 못하다고 내치지 않는다. 그 누구, 무엇과도 함께 어우러져 한판 벌일 수 있는 한국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인 조화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곳이 인사동이다.

공연장에 들어설 때 옷매무시를 가다듬듯 인사동은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각박한 세파에서 부대끼느라 잊고 지내던 가슴 저 깊은 곳의 넉넉함을 되돌려 주는 곳 - 그 곳이 인사동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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