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푸른 색으로 연 한국화 새 지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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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온통 붉은 칠갑을 한 듯 ‘참혹하지만 꽃다운’ 그림 ‘명성황후’는 박생광이 명성황후가 불태워진 자리를 보고 그 이미지를 채색으로 살려낸 걸작이다.

내고(乃古) 박생광(1904~85.사진)은 아호처럼 '그대로' 살다간 화가다. 작고하기 1년 전 마지막 개인전을 앞두고 소설가 최일남씨와 나눈 대담에서 그는 "살고 있으니까 이런 것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각별히 무슨 뜻이 있겠느냐"며 "그대로 살다 죽자 이겁니다"라고 했다. 팔순을 넘긴 내고는 "봄이 온 것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림을 안 그렸다면 중이 되었을 것이지만 중보다는 화가가 된 것이 더 좋다던 박생광은 단청도 탱화도 아닌, 노을보다 더 붉고 바다보다 더 푸른 그림 세상을 풀어놓고 갔다.

살아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박생광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4년, '박생광의 해'를 맞고 있다. 경남 진주생인 그는 일본 유학에 이어 채색화를 업신여기는 한국 화단의 풍토 속에서도 그 특유의 사투리로 "응, 인자 내가 한번 기리(그려) 보는 거지"라는 뚝심을 버리지 않았다.

"한국 화단의 대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삼류 중국 산수화를 모방하거나 일본의 사조파(四條派)를 버무려 놓은 것이 많다"고 일갈했던 그는 말년 몇 해를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휘돌며 "괜찮제? 괜찮제?"라는 득의의 한마디로 요약한 자기만의 회화세계를 후학에게 남겼다.

17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이영미술관(관장 김이환)에서 열리는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은 "잘 생긴 것을 내 나라 옛 것에서 찾아" 채색 한국화의 새 길을 연 그의 대표작을 모은 자리다. "참혹하지만 꽃다운"이라고 스스로 표현했던 '명성황후'와 한국미술사에 역사화의 경지를 개척한 '전봉준' 등 박생광의 그림을 말할 때 꼭 짚어야 할 초기작부터 말기작까지 150여 점이 나왔다.

작가의 고향 후배로 그의 그림에 빠져 후원자로 새 삶을 살았던 김이환 관장이 목숨처럼 가꾼 미술관은 내고의 붉은 빛으로 불타오르는 듯하다. 17일 오후 6시 미술관 윗뜰에서는 내고가 즐겨 그렸던 만신 김금화씨의 진혼굿이 벌어지며 18일에는 미술비평가 최열.박영택씨 등이 참여하는 학술세미나가 이어진다. 031-213-8223.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24일까지 열리는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무속' '탈과 학' '십장생' 연작 등 가장 내고다운 작품 50여 점을 선보여 이영미술관의 특별전을 보완하고 있다.

고인이 쓰던 각종 그림 도구와 밑그림 등 자료도 30여 점 나왔다. 18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는 최병식 경희대 교수가 '박생광의 생애와 시기별 예술세계'를 밝히는 강연회도 마련됐다. 유가족(대표 박정) 측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내고가 말년을 보낸 서울 수유리 작업실 겸 집을 문화재로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02-734-61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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