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보안법, 명분 아닌 실용적 접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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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가보안법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들은 우리 사회의 수준과 격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사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름할 담론을 합리적.지성적으로 풀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패거리 짓고 인신공격하고 감정적인 욕설을 퍼붓기에 바쁘다. 이래서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

보안법 문제에 대해서는 유지와 개정, 대체입법과 폐지 등으로 국민의 의견이 엇갈려 있다. 주장의 폭이 넓은 것은 광복 후 격동하는 정치상황 속에서 개인적.사회적 체험이 달랐기 때문이다. 각각의 주장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보안법이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것도, 한국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막아낸 순기능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어느 한쪽만이 진실인 양 외치는 것은 선동일 뿐이다.

보안법 개정이나 유지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또는 보수 원로들을 향해 '독재정권 하에서 온갖 영화를 다 누린 수구꼴통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라고 악담을 퍼붓는 행위는 한심하다. 또 보안법 폐지나 대체입법을 주장한다고 해서 '김정일 정권과 연대해 안보와 헌법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몰아세우는 것도 문제다. 서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면 대화와 협상이 필요하겠는가. 거기에는 목숨을 건 투쟁만 남게 된다. 상대방의 주장도 국가의 장래를 위한 것이며, 시각과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남북한의 신뢰구축보다 더 시급한 것이 남남 간의 신뢰구축이다.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대중이 부정하면 좋은 것이 못 된다"고 충고했고, 백도웅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도 "보안법은 폐지돼야 하지만 불안감을 느끼는 국민 정서를 무시하고 성급하게 하려는 것도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보안법을 고수한다고 안보가 확보되는 것도 아니며, 보안법을 없앤다고 금방 인권국가가 되지도 않는다. 극단적.감정적 대응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명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실용적 입장에서 접점은 충분히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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