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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허규 前 국립극장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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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며칠 전까지도 오는 5월 6일 국립극장 무대에 오를 창극 '수궁가' 연습에 열중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당뇨병.고혈압 등 지병도 크게 나아져 즐거워 했는데…. "

한국 전통연극을 재창조하는 데 앞장섰던 허규(許圭.66)전 국립극장장이 27일 밤 10시 4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딸 윤정(胤晶.서울대 국악과 강사)씨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수궁가' 연출을 맡은 김명곤(金明坤)국립극장장은 "지난 2월 이후 여러번 연습장에 나와 본인이 대본을 쓴 수궁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면서 "결국 '수궁가' 가 선생님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고 아쉬워 했다.

許씨는 판소리.민요.굿 등 우리 전통 연희(演戱)를 현대적 연극에 도입한 선구자. 지금은 '전통의 현대화' 가 모든 예술 분야의 화두로 거론되지만 許씨가 1973년 극단 민예를 창단하면서 한국 전통극의 현대화를 실험했을 때만 해도 주위의 반응은 냉랭했다.

"70년대 초만 해도 우리 연극계는 서양작품의 번역극 일색이었습니다. 우리 것을 한다면 감각이 낡은 사람으로 외면당하기 일쑤였죠. '선생님과 제가 '외로움을 못이겨 밤새 통곡을 한 적도 많아요" 그의 수제자격인 극단 미추의 손진책(孫振策)대표의 회고다.

許씨의 일생은 우리 전통극의 재발견으로 귀결된다. 지난 60년 한국 현대연극의 포문을 연 실험극장의 창단멤버로 연극무대에 정식 데뷔한 이후 70년대부터 마당극.창극.판소리 등을 새롭게 꾸며 연극무대에 올리는 데 매진했다.

'초가집도 없애고…' 등의 노래에 맞춰 우리 모두가 '앞으로 앞으로' 를 외치던 시절에 오히려 거꾸로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나선 것이다.

77년에는 경북 안동의 하회(河回)가면 제작에 얽힌 설화를 재해석한 '물도리동' 으로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다사라기' '춘향전' '성웅 이순신' 등 많은 작품을 연출했고, 88년엔 서울올림픽 개막식 안무와 거리축제를 총괄했다.

실험극장 창단 동인인 김의경(金義卿)서울시립극단장은 "연습장에서 끝까지 잠을 안자고 무대를 지킨 사람은 許씨 뿐일 정도로 작품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며 "그가 민간인 최초로 국립극장장(81~89년)에 취임했을 때 문화계는 이를 '문화혁명' 으로 평가했었다" 고 말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현령(朴賢玲.62.시인)씨와 아들 윤무(胤茂.SBS PD), 딸 윤정씨가 있다. 영결식은 31일 오전 10시 문예진흥원 앞마당에서 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31일 오전 9시.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거행된다. 364-9499.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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